4월 22, 23일 (22, 23일차)
워낙 피곤했었기 때문에 어젯밤에 잠자리에 들 때는 늦잠을 자기로 단단히 맘먹고 잠을 잤다. 하지만 눈을 떠보니 고작 8시 20분이 넘은 시간이었다. 시간제한 없이 잠을 잘 경우, 한국 같았으면 점심 때는 되어야 일어났을 텐데, 여행지에 와서 항상 일찍 일어나다 보니 벌써 습관이 되어버렸나 보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야가 점점 밝아지고 의식도 부기가 빠진 것처럼 점차 또렷해져서 어차피 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조식이나 먹을까?” 중년생이 사회에게 물었다. 오늘 상당한 늦잠을 잘 줄 알고 어젯밤 잠들기 전에 조식은 건너뛰자고 했었는데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오케이, 고!” 흔쾌히 동의하는 사회였다.
(2023년 4월 22일 토요일)
조식은 여전히 따뜻하고 깔끔했으며 한결같이 맛있었다. “근데 이 레드 오렌지 주스 맛있다! 한국에선 먹은 기억이 없는데.” 여느 때처럼 붉은색 오렌지 주스를 마시다가 사회가 만족감을 표시했다. 찾아보니 영어로는 피처럼 붉은색이라서 블러드 오렌지(Blood Orange)라고 불리는 아란시아 로싸(Arancia Rossa)였다. 이름을 알고 먹으니 더 특별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사회와 중년생은 천천히 조식을 즐기고 방으로 돌아와서도 최대한 느긋하게 움직였다. 침대에 반쯤 누워서 기차 편을 검색해보기도 하고, 커튼을 걷고 호텔의 자그마한 중앙정원 위로 뚫린 네모 반듯한 하늘과 지나쳐가는 구름을 감상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빈둥거렸다는 소리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쉬러 온 여행인데 정말 쉰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은 쉬었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나라에 와서 하나라도 더 보려다 보니 정작 몸은 쉰 적이 없었던 지난 20여 일이었다. 그러다가 사회가 말했다. “쉬더라도 나가서 쉴까?” 중년생이 바로 대답했다. “그래, 곧 청소하러 올 시간이기도 하네.” 이 두 마디에 두 사람의 마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호텔에 머물다 보면 항상 오전에 청소를 하러 오는데, 이때 이미 외출했으면 상관없지만 객실에서 쉬고 있다면 어쩐지 내 방인데도 방을 비워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되곤 한다. 물론, 청소하지 말아 달라는 팻말을 문 밖에다가 걸어두면 방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방이 깨끗해지는 시간을 놓치기도 싫어서 항상 고민하다가 결국, 매번 나가게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비행기 타고 한참을 걸려 여기까지 왔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쉬더라도 나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여차저차한 이유로 준비해서 밖으로 나온 시각은 오전 10시. 좀이 쑤셔서 더 이상 미뤘다간 오히려 없던 병이라도 생길 지경이었다. 피곤하다고는 해도 역시 기본적으로 팔팔한 두 사람이었다. 나오는 길에 호텔 테이블에 2유로 동전을 하나 놓고 나왔다. 그제 5유로 팁을 간단한 메시지와 함께 두고 갔더니 그 이후로는 팁을 가져가는 청소 담당 직원이었다. 얼굴을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어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피렌체에 묵었던 열흘 동안 310호를 깨끗하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다는 말을 전한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호텔 밖으로 나와 곧장 앞으로 뻗은 아주 작은 골목길을 따라 잠시 걸었다. 1분도(아마도) 안 걸리는 거리를 지나면, 골목이 끝나는 곳에 말도 안 되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피렌체 두오모가 펼쳐진다. 두오모가 나타난다고 표현하기엔 매일 봐도 항상 충격적인 아름다움이 있으므로 펼. 쳐. 진. 다.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저번에도 언급했었지만 호텔이 두오모 코 앞이었기 때문에 아침에 나오면 두오모를 한 번 둘러보고 가는 것이 피렌체에서의 우리의 루틴이었다. 4월 22일 토요일 오전 10시 경의 두오모의 얼굴도 눈부셨다. 하늘도 맑고 구름도 적당해서 더할 나위 없었다. 언제 봐도 현실감 없는 마치 CG 같은, 아니 그림 같은 자태를 천천히 한 바퀴 훑어봤다.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이 지나가면 무심결에 눈길이 가듯, 두오모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입장을 위해 줄 서있는 관광객들이 더 많아 보였다. 이런 줄은 서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사회가 말했다. 완벽하게 맞는 말이라고 중년생은 생각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은 정말 천천히 시내를 걸었다. 어느 정도 여유롭게 걸었냐 하면, 아직 오픈 전인 식당 외벽에 붙은 메뉴판을 정독하고 해석하기도 하고, 하다 못해 길거리 벽에 칠해진 페인트의 색깔이나 돌바닥의 작은 균열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가지고 대화를 할 정도였다. 한 마디로, 어떤 일정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형태의 산책이었다. 걷고 있지만 피곤이 쌓이지 않을 정도로 느린 힐링산책이었다.
이 때는 스마트폰도 꺼내고 싶지 않아 찍은 사진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배가 고플 때까지 피렌체의 소소한 것들에 관심을 보이며 거닐다가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당연하다는 듯 중앙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먹는다는 목적이 생긴 두 사람의 걸음은 좀 전과는 달랐다. 거침없는 2쌍의 다리는 행진하듯 빠르고 리드미컬하게 전진했다. 도착한 곳은 네르보네. 벌써 세 번째인 곱창 버거 가게였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업무 분배가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중년생은 줄을 서고, 사회는 가게 건너편에 음식을 먹고 갈 수 있는 자리를 맡았다. 주문은 클래식 곱창 버거 2개와 4분의 1병 하우스 레드 와인. 가격은 13유로. 이제 보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다시 한번, 이곳의 곱창 버거를 말하자면 크게 2가지라고 할 수 있다. 푹 익힌 곱창을 보는 앞에서 잘라 다져서 파니니에 끼워주는 클래식 버전과 미리 채소와 함께 다져서 담아 놓은 곱창을 파니니에 끼워주고 매운 소스(우리 입맛엔 전혀 맵지 않지만)를 넣어주는 버전이 있다. 이 중에서 중년생의 추천은 ‘클래식’이다. 곱창을 평소 즐기지 않는 분이라면 매운 소스가 들어간 것이 덜 느끼해서 더 나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차피 먹을 거! 원조의 품격을 드셔 보시라. 정말 부드럽고 고소하고 맛있다. 참고로 중년생은 순수한 팬심일 뿐, 이 곱창 버거집과 어떤 관련도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 흠흠.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이번에도 두 사람은 당연한 듯 중앙시장 남쪽으로 난 길을 걸어 벌써 몇 번이나 갔었던 젤라또 가게를 방문했다. “챠오~” 특별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직원이 이제는 우리 얼굴을 아는 것 같은 친근한 눈빛을 보냈다. 솔로 콘 2개에 6유로. 더 유명한 젤라또 집보다 먹어 볼수록 우리 입맛엔 이 집이 제일이었다.
사람은 참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다. 예민하거나 화가 날 때 이유를 찾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정말 직접적인 이유는 배고픔일 때가 대부분이고, 졸릴 때도 사실 그 원인은 컨디션 저하나 잠 부족보다 배불러서일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도 그랬다. 두 사람 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 쌓인 피로도 한몫은 했겠으나, 틀림없이 주된 원인은 배부름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정해진 일정이라곤 ‘휴식’ 밖에 없으니 돌아가서 자면 그만이었다. 시간도 이미 1시 30분. 호텔 청소도 끝났을 시간이었다. 사회와 중년생은 피렌체의 중심부는 주요 관광지가 몰려있어 어디든 가깝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숙소를 향해 발맞춰 흥겹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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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가 되어가는 시각. 숨소리도 들릴까 말까 하게 조용한 호텔 방안 침대에는 정말 피곤했는지 여전히 두 여행객이 곤히 잠들어 있다. 살짝 열어 둔 창문에는 밖의 햇살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얇게 비치는 커튼이 아주 가끔씩 하늘대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밝지만 기세는 다소 수그러들고 있는 7시 경의 햇살이 이 시간까지 잠들어있는 두 사람을 애잔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기지개를 먼저 켠 것은 이번에도 사회였다. 기척이 느껴졌는지 오래지 않아 중년생도 눈을 떴다. 둘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정말 잘~ 잤다!” 사실이었다. 머리끝에 덩어리처럼 머물러 있던 피곤이 여드름 짜내듯 쏘옥- 빠져나간 개운함이 느껴졌다. 꼭 필요한 잠을 잤다는 확신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잠시 지배했다 떠나갔다. 기지개에서 스트레칭 단계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사회와 중년생. 또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저녁이 가까워서인지 식당 메뉴판에 관심이 갔다. 그렇다고 무겁게 정찬을 즐기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기차역 건너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앞 광장이 떠올랐다. 은근히 예쁘고 한적해서 좋았던 기억이 있어 그리로 걸었다.
도착한 광장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이 적당히 있었다. 상쾌하고 여유로웠다. 저 멀리 건물 뒤로 노을의 기운이 옅게 번져 올라오고 있었다. 광장 주변으로 펼쳐진 음식점들의 야외 테라스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앉자!” 사회가 말했고 중년생도 그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오스테리아 직원에게 물어보니 밤 9시에 예약이 되어 있어서 식사는 힘들 거라고 했다. 우리도 식사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페리티보(Aperitivo)로 간단히 와인과 탈리에레(Tagliere)는 가능하냐고 다시 물어봤다. 흔쾌히 앉으라고 하는 직원. 우리는 물도 한 병 주문하고 여유롭게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 금세 짙어지는 노을. 자리가 정말 산타 마리아 노벨라 광장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너무 낭만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주문한 하프 보틀 끼안티 클라시코 와인 한 병과 탈리에레 한 접시가 나왔다. 사랑스러운 프로슈토와 치즈, 허브, 꿀까지 완벽한 살루미 탈리에레였다. 여기서 탈리에레(Tagliere)는 이탈리아어로 도마를 뜻하는 단어인데, 쉽게 말해서 햄 치즈 플레이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무 도마 위에 햄과 치즈, 꿀 등을 보기 좋게 플레이팅 해서 내오기 때문에 도마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았다. 이탈리아에서는 흔히 탈리에레를 식전에 식욕을 돋우는 프리미 피아띠로 먹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처럼 아페리티보로 와인 안주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어떻게 이 정도를 본식이 아닌 애피타이저로 먹을까? 싶을 만큼 넉넉한 양의 탈리에레 한 접시였다. 탈리에레와, 그리고 석양이 물든 성당과, 그 앞의 여유를 머금은 광장까지 곁들인 와인은 누군가 표현한 것처럼 ‘신의 물방울’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한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덧 8시 반이 지나 완전히 어두워지자 건너편 호텔 외벽에 들어온 조명이 반대로 선명해졌다. 예쁜 호텔이었다. “다음에 저기 묵자.”, “다시 올 수 있을까?” 대화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계산을 하고(총 58유로) 직원과의 약속 대로 9시 전에 일어났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 직원. 한국이라고 대답하니 활짝 웃는다. 운이 좋은 건지 우리가 만난 이탈리아 사람은 대부분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건 사실이지만 엄연한 아페리티보. 배가 부를리는 없는 두 사람은 자연스레 마트로 향하고 있었다. 파인애플과 블루베리를 작게 포장한 것 하나, 모닝빵 한 봉지, 작은 치즈 하나와 저렴한 끼안티 와인을 한 병 샀다. 호텔로 돌아오니 9시 반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사회와 중년생은 빠르게 씻고 와인과 음식을 세팅한 후 TV의 전원을 켰다. 사회가 채널을 돌려 아미치(Amici)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틀었다. 이탈리아어로 ‘친구’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 아미치(Amici) 프로그램은 노래, 춤 등으로 경합을 벌이는데 탈락 후보가 선정되면 그 후보끼리 다시 대결 후, 매주 최종 탈락자를 1명씩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베네치아 호텔에서 TV를 틀다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보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에 있은지도 좀 되다 보니 어느덧 애청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쟤 보다 쟤가 잘하네!”부터, “저 심사위원은 이탈리아에서 유명한가 봐!” 까지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사회와 중년생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봤다. “근데 이거 최종 우승자는 돌아가기 전에 확인할 수 있을까?” 사회가 진지하게 말했고, 중년생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에너지 충전이 98프로 완료된 두 사람이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잘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남은 2퍼센트를 채우기 위해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꿀에 찍은 프로슈토가 날아다니는 꿈을 꾼 행복한 밤이었다.
(2023년 4월 23일 일요일)
피렌체에 온 지 8일 차 아침. 오늘은 7번째 조식을 먹을 차례였지만 사회와 중년생은 과감하게 건너뛰고 침대에서 빈둥거림을 택했다. 피렌체 생활도 슬슬 막바지라 특별한 일정도 없었다. 두 사람은 암막 커튼과 엷은 흰색 속 커튼을 열고, 창문까지 열어둔 채 한 껏 여유를 부리며 누워서는 호텔 중앙 정원 위로 조그맣게 뚫린 사각형 하늘을 감상했다. 새파란 하늘 옆, 옅게 문질러진 구름 사이로 아주 조금이지만 빼꼼히 머리를 드러낸 피렌체 대성당이 보였다. 사람으로 치면 몸을 숨기려다 실수로 옷 소매가 살짝 드러나 보인 정도의 느낌이랄까.
중년생이 우리는 피렌체 대성당 뷰 호텔에 묵고 있는 거라며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다. 착한 사회가 가까스로 웃어주다가 외치듯 말했다. “나가자 우리!” 아무래도 방에서 쉬기엔 아까운 하늘과 온도였다. 나가자마자 두 사람은 당연한 듯 두오모에 인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열 번을 보고 스무 번을 보고 360도를 돌아봐도 볼 때마다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감탄. 사회와 중년생은 역시 명작은 질리지 않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체감했다.
한참을 둘러보고 나서 이제 뭐를 할까 망설이던 그때. 꼬륵- 중년생의 배가 말을 했고, 꼬르륵- 사회의 배가 이어서 대답했다. 절묘한 타이밍에 웃음이 터졌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30분. 여행 와서 항상 아침을 먹다가 거르니 배가 요란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습관은 정말 무섭다. 적당한 커피 바를 찾아 배를 채우기로 한 사회와 중년생. 그러고 보니 피렌체에 와서는 매일 아침 호텔에서 조식을 먹었기 때문에 바에서 커피와 꼬르네또를 즐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걷다 보니 우리가 자주 가는 젤라또 가게가 보였는데 가만 보니 이 가게, 커피와 빵 류도 파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항상 밖에서 젤라또만 주문해서 전혀 안을 들여다볼 생각도 못했었는데 생각보다 매장도 넓고 깨끗했다. 테이블에 앉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우리는 그냥 간단히 바에서 먹고 가기로 결정했다. 둘 다 각각 카푸치노 1잔과 꼬르네또 1개를 먹었다(총 7유로). 흰 접시와 흰 우유 거품, 짙은 갈색 꼬르네또와 진한 주황색 냅킨의 색이 선명한 조화를 이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였다. 맛으로 보나 가격으로 보나.
거리로 다시 나온 두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중앙시장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목적지는 가죽시장이었다. 사실 아침에 두오모를 한 바퀴 돌아볼 때 근처에 있던 가죽상점의 쇼윈도를 눈여겨봤었다. 중년생이 매형 선물로 가죽 가방을 하나 사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어디를 가야 좀 더 둘러볼 수 있을까 하다가 생각난 곳이 가죽상점이 몰려있는 피렌체 가죽시장이었다. 이곳은 곱창버거를 먹기 위해 중앙시장을 갈 때마다 지나치던 골목이었는데 길 양쪽으로 가판대들이 줄지어 있고 거기서 각종 가죽 제품들을 파는 형태로 되어있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엄청난 호객행위 때문에 뭔가 부담스럽고 썩 믿음이 가지 않아서 나중에 봐야지 나중에 봐야지 하며 미뤘었는데 그 나중이 바로 오늘인 셈이었다. 도착한 가죽시장은 역시나 붐비는 관광객과 호객행위를 하는 직원들로 정신이 없었다. 한 바퀴 쓱- 둘러본 두 사람. 분위기 때문인지 얼핏 봐도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징을 발견했는데 판매하는 직원들이 모두 외국인(이탈리아인이 아닌)이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안될 것 없는 점이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피렌체 가죽시장인데 외국인이 외국인에게 판매하는 모습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 뒤에도 다 가죽상점이네?” 뭔가 발견한 사회가 소리쳤다. 진짜였다. 거의 건물 한 층높이의 가판대들이 건물 앞으로 빼곡하게 줄지어 서 있어서 가려진 뒤편은 볼 생각도 못하고 지나쳤었는데 가판대 뒤 1층이 전부 가죽상점이었던 것이었다. 뭔가 거기에서 ‘진짜’의 느낌이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물론 가판대 물건들이 ‘가짜’라는 것도 아니고, 사회와 중년생의 촉에는 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이때의 우리는 뭔가 확신이 있었다. 인도 쪽으로 올라가 상점들을 눈여겨보며 다니다가 느낌 좋은 가게 안으로 무작정 들어섰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다른 곳과는 제품 디자인도 다르고, 무엇보다 그 다른 디자인이 사회와 중년생이 선호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열대 가운데에 놓인 밝은 갈색 서류 가방이 중년생의 눈에 들어왔다. 매형 선물로 주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꼼꼼하게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 분이세요?” 깔끔한 중년 남성 한 분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낯선 곳에선 워낙 경계하는 중년생의 성격인지라 처음엔 한국인 직원을 채용한 가게인가 싶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조금 얘기하다 보니 한국에서 피렌체로 출장을 온 분이었다. 쨌든, 그분은 피렌체로 올 일이 있으면 꼭 선물을 살 때 이 상점에 들르는데, 이번에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동료 직원들을 위한 간단한 선물을 사는 중이라고 했다. 사장님과도 아는 사이니 살 게 있으면 본인이 있을 때 같이 사라는 말도 했다. 그러면 가격도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결국 사회와 중년생은 여기서 매형 선물용 가죽 서류 가방을 구입했다. 제품도 가격도 마음에 들었지만 구입을 결정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이유지만 사장님이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한국에서 한복을 사는 경우, 미국 사장님 보다는 한국 사장님이 운영하는 가게가 막연하지만 어쩐지 더 믿음이 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만족스럽게 가게를 나선 사회와 중년생은 우리를 도와준 한국 분을 ‘피렌체 가죽요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중년생은 피렌체 가죽요정이 동종업계(광고업) 분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었다. 차림새나 말투도 그렇지만 결정적으로는 우리가 카드로 결제할 때 카드의 디자인을 보고 예쁘다며 어느 회사 카드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업계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디테일하게 반응할 부분은 아니었으니까. 만약 추측이 틀렸다면, 피렌체 가죽요정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는 바이다.
두 사람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기차역 지하 쇼핑센터였다. 가볼까 말까 망설였던 가죽시장을 클리어 한 김에, 역시 고민했던 스타벅스 매장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자국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서인지 스타벅스 매장을 찾기 힘든 이탈리아에서 우리가 발견한 첫 매장이었기에 더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스타벅스는 그냥 스타벅스였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거의 같은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점이지만, 반대로 특별한 점은 별로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매장 앞 주문 줄에는 관광객들이 상당히 늘어서 있어서 음료는 마시지 않기로 하고, 간단한 기념품으로 스타벅스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잔 하나(8유로)를 샀다. 국가별 도시별 머그컵과 잔 판매는 누가 생각해 냈는지 마케팅의 천재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1시가 다 된 시각. 다음 행선지는 따질 것도 없이 호텔 우리 방이었다. 커다란 가죽 서류 가방을 계속 들고 다니기엔 너무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쇼핑한 짐을 내려놓고는 방으로 돌아온 김에 침대에 걸터앉아 배가 고파질 때까지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조금 긴 여행의 좋은 점은 일정이 넉넉해서 중간중간 맘대로 쉴 수 있다는 것이다. “근데 뭐 먹지?” 사회가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이 머릿속으로 메뉴를 떠올리는 얼마간 정적이 이어졌다. “아, 그거 먹을까? 피자! 아, 그 왜~ 가이드가 추천해 줬던 거!” 사회의 아이디어에 중년생도 동의했다. “나가자, 바로 옆이잖아~”
정말 가까운 곳에 피렌체 야경 투어 때 가이드가 추천해 준 피자집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영화배우로 잘 알려진 소피아 로렌의 이름을 사용한 피자가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실내도 소피아 로렌을 콘셉트로 너무 우아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걸 보면 이름뿐만 아니라 배우가 직접 참여한 레스토랑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가이드가 추천해 준 아솔루토 디 포모도리(Assoluto di Pomodori) 피자와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딴 소피아 로렌(Sophia Loren) 피자를 하나씩 주문했다. 생맥주로는 Moretti. 나중에 후식으로 에스프레소 한잔씩도 더했다(총 55.40유로). 지금 생각해 봐도 이 가게는 우리에겐 ‘뜻밖의 발견’이었다. 처음 피자가 나와서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충격적이었다. 무난한 맛을 생각했던 기대치를 열 배, 아니 백 배는 넘어서는 맛이었다. 특히 아솔루토 디 포모도리 피자는 보기에는 토마토, 치즈가 넉넉하게 토핑 된 평범한 느낌이었는데 맛은 먹어본 피자 중에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피자에 무슨 짓을 한 거야???’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맛이었다. 피렌체가 1호점이고 밀라노에 분점이 있다는 것으로 들었는데, 이탈리아 여행 중 발견하신다면 한번쯤 드셔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체력이 다시 완충 상태가 된 사회와 중년생은 가죽시장에 다시 한번 들르기로 했다. 아까 서류 가죽 가방을 살 때, 매장에 카드 지갑이 있었는데 비싸지 않으면 몇 개 사고 싶어서였다. 다시 도착한 매장. 들어가서 색색의 가죽 지갑을 고르고 있는데 사장님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아침에 서류 가방 사간 걸 기억한다고 했다. 또 왔으니 조금 더 할인을 해준다고 하며 활짝 웃으시는 사장님. 그렇게 예쁜 카드 지갑을 좋은 가격으로 몇 개 더 구입한 사회와 중년생은 거리로 나와 느긋한 피렌체의 오후 골목길을 발길 닿는 대로 누볐다. 걷다 보니 레푸블리카 광장 한쪽에서 실을 매단 인형극을 하고 있어서 잠시 눈요기를 하기도 했다. 여유롭고 여유롭고 또, 여유로운 오후였다.
이제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피렌체에서 하루의 마무리는 와인이었다. 레드 와인의 맛에 눈을 떴다고 해야 할까. 와인샵에 들러 한 병을 포장했다. 오늘의 선택은 아마로네. 한 병씩 마셔 본 3대 와인 중 사회의 입에 가장 맞는 것이 아마로네였기에 결정했고, 대신 이번엔 다른 생산자 것을 골랐다(39.9유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안주 겸 저녁장을 보는 것도 이젠 자동이었다. 겉면을 살짝 구운 프로슈토(Prosciutto Arrosto)와 볼로냐 산 소시지인 모르타델라(Mortadella), 그리고 약간의 과일과 음료수를 사서(16.84유로) 휘파람을 불며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에 이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와인과 저녁장 세팅. 두 사람은 먹기도 전에 이미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같은 아마로네라도 전혀 달랐다. 맛의 기본 뼈대는 같지만 가지가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이제 프로슈토는 익숙해져서 입에 착착 감기는 기분이었다. 문득,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많이 먹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검색해보지 않아도 현지보다 구하기 어렵고 비쌀 것은 당연할 테니까.
사회와 중년생은 꿀 같은 저녁을 먹으면서 내일 뭐를 해야 좋을까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모레 피렌체를 떠나니까 사실상 내일이 온전히 보내는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잡을 수 없는 피렌체 8일 차의 밤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말소리는 끊이지 않고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어느덧 피렌체에서의 9일째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