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음악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인 Suin Park Jun 29. 2023

조율이란 무엇인가

적정선을 위한 달구질

                        

이 글은 음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의 이야기에요. 그렇지만 저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 어쩌면 음악에 관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에 관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것 같았어요. 이 지면에 이런 글이 어울릴까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마감을 사흘 앞두고서야 자판을 두드리는 이유입니다. 제 이야기는 6월 초 다녀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전시 ‘전자적 숲; 소진된 인간’에서 시작됩니다.





어리숙한 중생의 명상 체험기


‘전자적 숲; 소진된 인간’은 5월부터 내년 2월까지 4부에 걸쳐 진행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전 ‘1부. 백남준과 함께 (전자)명상하기’, 그중에서도 1-3 ‘<블루부처>의 허밍’에 다녀왔어요.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 <블루부처>에 살라만다, 씨피카, 아나 록산느 세 아티스트의 앰비언트 음악이 결합된 전시였어요. 전시? 흠. 글쎄요. 전시를 가장한 명상 체험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겠네요. 전시장에는 부처를 형상화한 미디어 아트가 놓여 있었어요. 여러 대의 작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선 수많은 이미지들이 쉴 새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현란하게 재생되고 있었고요.


‘<블루부처>의 허밍’ 전시장 ⓒ 에디터S 직접 촬영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니 이제 시작인가 봐요. 텔레비전 속 이미지들을 응시하면서 소리를 들었어요. 사실 무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저 백남준의 <블루부처>가 음악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팔짱 끼고 삐딱하게 관찰해보는 것 밖엔요. 그렇지만 얼마 안 가 화면 속 빠르게 스쳐 가는 이미지에 눈이 피로해지기 시작했어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소리에 온 감각을 집중시켰어요. 15분쯤 지났을까? 슬슬 지루함이 몰려옵니다. ‘하, 이거 한 시간이나 들어야 하는데. 벌써 지루하면 어쩌지? 이미지도 대강 봤고, 소리도 좀 들었고. 이제 뭘 더 해야 해?’ 무얼 하든 그것을 하는 ‘이유’, ‘목적’이 필요한 제게 가만히 있는 시간은 그 자체로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아! 지금 할 수 있는 게 생각났어요. 계속 미루어 왔던 스스로의 숙제가 있었거든요. 이전에 비하면 신체도, 정신도 꽤 건강해지고 안정화되었지만 최근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불쑥 올라와 불쾌해지곤 했었어요.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던 참이었거든요. ‘지금부터 한 40분. 그 생각을 좀 해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 지금에야 돌이켜보니 나란 인간 참 지독하다 싶지만, 어쩌다 보니 그 시간은 제 마음을 가장 투명하게 관찰하는 기회를 가져다주었어요. 음악의 힘일까요? “아무리 가부좌 틀고 앉아 명상하는 흉내 좀 낸다고 해 보았자 마음속은 온갖 너저분한 생각들로 시끄러운 중생들!” 이렇게 비웃는 듯한 백남준의 미디어 부처 앞에서, 발광하는 빛과 요란한 이미지들의 방해를 뒤로 하고 저는 음악 소리와 함께 깊이, 더 깊이 제 마음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마음속 탐험중


ⓒ Unsplash

여러분. 지금 여기는 제 생각 속이에요. ‘<블루부처>의 허밍’의 전시장 안에서 갈팡질팡 대던 생각은 순식간에 어느 한 시점으로 이동했어요. 때는 바야흐로 박사 논문을 쓰던 약 2년 전. 네, 저의 암흑기입니다. 그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결과물의 질적 수준이 어떻든 간에, 졸업 논문을 쓰는 그 과정은 저를 몹시 황폐화했습니다. 일도, 공부도 ‘빨리’,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컸던 게 문제였어요. 겉욕심이라고 하죠. 자기 분수에 넘치게 탐하는 것. 부끄럽기 짝이 없는 졸업 논문을 마친 후 참석한 첫 주일 예배의 설교 주제는 ‘과유불급’이었어요. ‘탁!’ 쇠망치가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어요. 많이 하는 것, 빨리하는 것,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나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 어디까지 가야 하고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는 말은 제 마음을 뜨겁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악기만 조율이 필요한가요? 어리석은 중생의 한없는 욕심이야말로 조율이 필요합니다.


그 후 저는 ‘과유불급’과 ‘절제’를 제 마음에 새겼어요. 그리고 그러려고 노력했어요. 재미있게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신나게 놀면서도, 나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생각되면 멈추었어요. 차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주변에서도 좋아 보인다고들 했어요. 안전한 속도와 은은한 에너지. 모든 게 완벽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매끈한 표면에 거칠한 돌기가 도드라지기 시작했어요. 안락한 저를 한 번씩 툭 건드리고는 불쾌한 마음을 일으킨 게 바로 그 돌기였어요. 이게 도대체 뭘까. 가만히 관찰해 보려는 그 순간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훅 올라왔어요. ‘대충하는 마음!’ 절 불편하게 만든 건 안전한 울타리 안에 어느샌가 자리 잡은 대충하려는 마음이었어요. 그걸 알아차린 순간 믿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이내 생각하기를 멈췄어요. 그냥 느꼈어요. ‘그게 불안했구나.’ ‘무섭고 두려웠구나.’ 음악만 조율이 필요한가요? 대충하는 마음과 공들이는 마음이야말로 적정선을 향한 조율이 필요합니다.





정성을 들이세요


제 마음의 돌기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후로도 계속해서 생각했어요. ‘왜? 좀 편하게 하면 안 돼?’ ‘꼭 잘해야 해?’ ‘많이 하는 게 능사가 아니잖아?’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거 아냐?’ 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요. 대충하는 마음은 남을 속이는 일이었어요. ‘이렇게 아무렇게나 해도 되나?’ 하는 마음은 곧 ‘어? 이게 되네?’ 하는 사기꾼의 마음으로 이어졌어요. 그리고 그 사기꾼의 마음은, ‘대충 해. 아무도 몰라.’ 이제는 나 자신까지 속이기 시작하더군요. 전 그게 무서웠어요. 겉으로는 무언가 그럴듯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텅텅 비어 위태로운 것. 당장 붕괴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아슬아슬함. 지난 씨샵레터 37호 VIEW에 실린 정경영 연구소장의 글 ‘챗GPT가 말하는 법’을 읽고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제가 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아무 의미 없는 말을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챗GPT의 말하기와 다를 게 없었어요.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 Unsplash


찬찬히 돌이켜 보니 전 제가 맡은 일이라면 그게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든, 혹 좀 가벼운 일이든 정성껏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바이올린을 하던 시절에는 활 연습, 음계 연습 같은 기초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고요. 운동을 할 때는 ‘자극을 느끼면서 정성껏 몸을 움직여 보세요’ 라고 하는 요가 선생님의 말이 좋았어요. 그 말을 들으면 정말로 건강해지는 것 같거든요.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고서는 선 긋기 시간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요. 오래 전 서예를 할 때도 그랬어요. 글자를 쓰는 일보다 선 긋는 연습이 즐거웠어요. 물의 농도와 붓의 탄력과 종이의 질감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 시간들이 저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공들이는 마음이 어느 순간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이는 사기꾼의 마음으로 변질된 거예요.



인생은 조율 (근데 이제 정묘함을 곁들인..)


저는 이런 제 이야기를 친구들과 자주 나누어요. 부족한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불완전한 제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주거든요. 사기꾼의 마음에 관한 제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해주었어요. 많이 하고, 빨리하고, 그럴듯해 보이게 하려는, 곧 대충하는 마음은 늘 불안에서 비롯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결국에는 나를 더 나아가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냐고요. 그것은 ‘제대로’ ‘정성껏’ ‘공들여’ 하는 마음과 극단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둘을 잘 조율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요.


ⓒ violinist.com


그분은 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정묘함’이라는 말이 떠올랐대요. 정묘함?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어요. 사전을 찾아보니 ‘깨끗하고 묘하다’, ‘청정하고 무구하다’ 라는 뜻이래요. 여전히 잘 와닿지 않는다고 했더니 ‘농부가 되고자 할 때 진짜 농부가 되는 것’이래요. (응?) 농작물을 건강하게 길러내기 위해 땅을 비옥하게 가꾸고 씨를 뿌리고 참되게 보살피는 것 말이에요. 초심을 잃고 대충하거나, 딴 맘 먹고 수확물로 부자가 되려는 게 아니라요. (아하!) 요령 피우거나 다른 궁리하지 않고 시작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 전 정묘한 인간이 되고 싶은 걸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요. (돈도 많이 벌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불순물 없는 안락함은 또다시 사기꾼의 유혹에 빠질 텐데요. 그렇지만 ‘정묘함’을 표지판 삼는 일은 값지다고 생각해요. 음악을 하는 나의 마음이, 나의 태도가 정묘함을 향해 있기를 바라요.



음악학술 매거진 '씨샵레터'에 소개된 글입니다.                                       

https://mrc.hanyang.ac.kr/2023/06/view40b/







매거진의 이전글 약동하는 음악의 생명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