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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Sep 19. 2023

윤슬아, 언니는 말이야

배추가 윤슬과 편지를 주고 받기로 한 이유

@고양 찬우물 농장 하지 축제 2023

난 자기애가 강해서 애초에 남에게 관심이 없다. 윤슬에게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윤슬은 내가 멀리하는 인간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운동을 드문드문, 그마저도 가까스로 했고, 술을 즐겼으며, 과자와 빵을 챙겨 왔다. 난 매일 운동을 하며 저녁 9시면 하품을 해댄다. 음식도 야채와 과일이 주식이다. 그러니깐 우린 낮과 밤처럼 다르다.


우린 고양시의 한 농장의 24절기 공부모임에서 만났다. 서너 절기를 함께 보내고, 그 시간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윤슬은 내 관심사가 아니였다. 정확히는 숙취에 갓 정신을 차려, 말수가 적은 윤슬보다 여름 텃밭의 기묘하고 신비한 일들이 더 재밌고 궁금했다. 두더지 게임 처럼 땅에서 계속 튀어 나오는 감자, 간밤에 비비디바비디부를 부른 요정이 다녀갔나 매일 미친 듯이 커지는 호박 등 여름 밭엔 마법 같은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그날은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은 하지였다. 농부가 제철 감자를 나눠먹고 담소도 나누자며 밭에서 잔치를 열었고, 농부와 텃밭이웃들이 스무여명이 모였다. 윤슬이 절기 공부방 선생님과 함께 작은 무대에서 우쿨렐레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제서야 그녀를 지긋이, 자세히 관찰했다.


윤슬은 절기 공부방 선생님이 지어준 별명이다. 왜 윤슬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알았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는 윤슬. 그 눈동자 속에 깊은 바다 그리고 반짝이는 윤슬이 뿌려졌다. 윤슬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던 거 같다. 목소리는 감미로웠는데 눈동자엔 수많은 감정이 포개어져 보였다. 어딘가 슬펐고, 아련했고, 따뜻했다. 윤슬아, 어떤 이야기들이 그리 아름다운 눈동자를 만들어 낸 거야.


이전부터 윤슬은 나에게 등산같이 가고 싶다고 했는데, 썩 당기지 않았다. 술마시고 새벽에 잠자는 아이와 산을 가는 건 글쎄다. 근데 윤슬의 눈동자를 보고 난 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폭염경보가 뜬 날, 등산을 감행했다. 산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최적의 공간이다. 윤슬의 눈동자에서 이야기를 꺼내려면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때론 질문은 폭력이 되곤 한다. 질문이랍시고 호구조사 하는 말들, 말할 준비가 안된 상대에게 어림잡아하는 질문은 상처를 주니깐. 그래서 질문을 거두고 나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부끄럽기도 하고 찌질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건냈다.


우리는 많은 것이 닮았고, 또 달랐다. 그날 윤슬은 등산 마치고, 무슨 프랑스 독립 영화를 보러 가고 싶어 했지만 난 싫었다. 윤슬은 시나리오 작가다. 그녀는 분명 좋은 글 노동자일 거다. 등산 내내 자신의 꿈도, 커리어도, 썸 스토리도 재밌게 이야기했으니깐. 중간중간 자신의 생각과 줄거리를 명대사처럼 뽑아내, 난 걸음을 멈추고 ‘크...’를 뱉었다. 근데 이 이야기를 왜 중간에 멈추고 영화를 봐야 한단 말인가. 윤슬의 이야기 만큼 더 근사한 건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대화하고 경험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거다. 윤슬은 영화 못 봐서 아쉽다고 말했는데, 현역 시나리오 작가가 참 감 떨어지는 소리 한다 싶었다. '윤슬! 지금 우리가 산에서 부터 써온 이야기가 그 대단한 프랑스 독립영화보다 더 재밌어. 너 왜 남의 이야기에서만 영감을 얻고, 남의 대사만 써줄려고 그래? 그리고 사실, 내가 이 스토리를 더 이어가고 싶단 말이야. 주인공이 도망가면 안 돼.'


우리는 활자 노동자다. 그래서 남을 웃기거나, 돈을 벌어거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쓴다. 일은 기쁨과 성장의 단초를 줬다. 하지만 그 좋아하는 글쓰기가 예술(창작)에서 노동으로 전환되면 가끔 외롭고 속상했다. 문장 하나하나 감정을 담아 강렬한 느낌표를 만드는 윤슬. 모든 사건에 물음표를 달며 논리를 만들고 싶어 하는 나. 둘이 만나면 물음표와 느낌표가 반복돼, 머리를 쥐어짜지 않아도 명대사와 명장면도 가뿐하게 뽑아냈다. 3시간이 훌쩍 갈정도로.


그래서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다.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각자 딱 5편씩만 쓰기로 했다. 내가 윤슬의 이야기를 꺼낼 기회는 딱 다섯번. 그 눈동자에서 맺혀있는 이야기를 글로 남기기 위해서, 나는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까발리기로 했다. 윤슬아 언니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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