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추도사 Feb 05. 2024

길을 잃게 만든 말이 나침반이 될 때

미적분을 풀려면 먼저 숫자를 알아야죠

호박과 가지, 깻잎을 한 상 가득 가져왔는데, 시장 마감 2시간 전 완판을 한 날

나는 멍청한 편이다. 말만으로는 못 알아먹기 때문이다. 덧셈을 처음 배웠을 때 누군가는 1+1을 암산을 해 바로 정답을 쓰지만 난 절대 그게 안 되는 아이다. 손으로 잡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탕을 두고 ‘사탕 한 개와 다른 사탕 한 개를 합해지면, 두 개가 되는 구나’라는 걸 시각과 촉각으로 느껴야 뇌가 인지했다. 첫 세일즈가 그래서 어려웠다.


나의 첫 세일즈 상사는 세일즈를 아주 잘한다는 채널톡의 조쉬였다. 세일즈는 그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뉠 거다. 이전엔 세일즈가 파는 행위, 또는 이를 위해 갑을 관계도 받아들이며 비굴하게 굴기도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세일즈 딜을 몇 번 따라가고 세일즈가 '적확한 질문을 던져 협상에 주도권을 갖는 일', '어떤 상황에도 숫자 1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 정의했다. 나는 그와 그의 세일즈에 매혹당했지만, 그는 내 세일즈나 일처리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숫자가 없는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함께 세일즈를 한 3개월 동안 조쉬의 질문에 속으로 '이상해', '모르겠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 수록 세일즈 동료들 모두 나와 일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넌 숫자를 읽지 못해'


나와 세일즈 할 수 없는 이유를 정확히 알려줬다. 근데 그말마저 이해가 안 됐다. 7년동안 글쟁이로 상황을 입체적인 이야기로 만드는 훈련만 했기에 보이지 않는 딜의 클로징 가능성도 숫자로 점치고, 보이지도 않은 전략을 숫자로 이야기하는데 그 셈법을 알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회의 때 구구절절 말하는데 그때마다 "숫자로 말해", "숫자를 못 읽는다"라는 지적에 '어릴 적 구몬학습 다 때웠거든?', '수능 수리영역도 2등급이었거든!' 근데 무슨 숫자를 못 읽는다는 거야 라며 부들부들거렸다. 근데 궁금했다. 우린 같은 숫자를 보는데 왜 다른 언어를 쓰는 것만 같을까.


어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딛고 나면 그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듯이 세일즈라는 세계가 그랬다. 더 이상 책상에 앉아, 세일즈 팀이 준 자료를 보면서 키보드 두드리며 자극적인 글을 쓰고 광고비를 소비하는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맘은 미적분 풀고 싶지만 당장은 덧셈 뺄셈은커녕 숫자가 뭔지도 모르겠으니깐 다시 수학 문제집의 첫 장으로 돌아갔다. 그 첫 페이지가 마르쉐 야채 시장, 그리고 룰루레몬 옷 판매다.


마르쉐 야채 장사 시작종이 울리기 전, 농부에게 물었다.

“오늘 목표 얼마예요?, 오늘 주력상품과 전략은 뭐에요?“


“그런 게 어딨어, 그냥 다 팔면 되지!" 그런 농부 말에 난 조쉬처럼 굴었다. "전략과 목표 없이 움직이면 안돼요. 숫자로 정해야해요!“ 그러면서 이웃 농부들의 야채 가격을 보면서 농부의 가격 측정 셈법을 배우고, 장사가 잘 안 되는 날은 목표를 수정하고 지나가던 사람들 잡아서 질문을 던지고, 요리법을 알려주고, 마지막 카드로 할인을 치면서 목표를 쌓았다. 실시간으로 지폐가 손에 쥐여지니 목표까지 얼마까지 다다랐는지 암산이 됐다. 다른 농부들이 수북이 야채를 들고 있을 때 우린 완판하고 정산 할 때 뿌듯했다.


룰루레몬에서도 옷을 팔면서도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여러 셈을 한다. 옛날에 조쉬가 나에게 했던 질문과 정보를 토대로. 그땐 모니터에만 존재하는 소프트웨어, 구글 시트에만 존재하던 숫자는 무형의 것이라 어려웠는데, 옷과 야채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고, 손님과 대화를 하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보니 셈이 쉽다. 이번주 목표 금액, 전체 트래픽 대비 전환율, 전체 매출에서 내가 팀에 기여하고 있는 비율은 어느 정도 인지. 내가 맡은 손님 몇명이 피팅룸에 몇 명이 들어갔고, 이 중 몇 명을 계산대로 보내야 오늘 매출을 달성할 수 있을지 암산한다. 매달, 매주, 매일 팀의 목표 숫자 하나를 받으면 그걸 잘게 인수분해해서 숫자를 만들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여러 공식을 조합해 증명하고 답을 만든다. 처음 한글을 배워서 길거리에 간판을 읽고, 틀려도 다시 옹알 거렸던 것처럼, 34살의 나는 세일즈라는 세계 덕분에 '숫자'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 세상을 요리조리 숫자로 읽는다.


하지만 숫자를 읽는 것보다 제일 재밌는 건 숫자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매장에 입장하는 손님에게 후다닥 달려가 인사를 하고, 왜 왔는지, 룰루레몬은 알고 있는지, 어떤 운동을 하는지, 손님이 킥킥 거리더라도 대꾸할 만한 질문을 하고 그 사람이 만진 물건이나 눈길이 닿은 마네킹을 살피면서 유추한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이러 매장에 들어왔다고 하면, 잘 왔다고 넓디넓은 피팅룸에서 이 옷 저 옷 다 입어보면서 쉬다 가라고, 그와 어울릴만한 옷을 집어다가 피팅룸으로 데리고 간다. 대화로 0에서 1을 만들어 낼 때, 질문과 경청으로 숫자 2에서 5로 만들 때, 손님에게 카드를 건네받아 결제를 하고 영수증 한 장을 뜯을 때 짜릿하다. 특히 동료들과 하나의 팀이 돼, 팀워크로 숫자가 제곱 돼 불어난 걸 볼 때 신난다. 역시 세일즈가 재밌을 줄 알았다.


모든 비즈니스는 숫자다. 그래서 이전에 마케터 일 때 숫자로 보고서를 썼다. 하지만 그 숫자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집행한 콘텐츠, 이벤트나 캠페인이 얼마만큼의 매출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증명할 때마다 그로스 마케터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에게 산수를 넘기고 숫자를 수동적으로 대했다. ’전문가의 셈법이 맞겠지‘하면서 함수가 걸린 구글시트에 숫자를 입력했다. 어쩌다가 함수가 풀리면 그들에게 다시 구글 시트 좀 만져 달라고 했다. 프로젝트의 책임자면서도 성과보고서에 쓰인 수많은 숫자들의 주도권과 책임감이 전혀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젠 돌아가면 그렇게 하진 않을 거다. 숫자를 읽을 줄 알게 됐으니깐. 숫자에 책임을 느끼고, 주체적으로 만들어 봤으니깐.


요즘은 숫자를 보면서 수많은 상상을 한다. 지금 1천 원짜리 야채를 팔고, 12만 원짜리 옷 파는 것도 이렇게 재밌는데, 2천만 원 에르메스 백을 파는 일을 얼마나 재밌을까. 건물과, 기업을 사고파는 일은 더 힘들고 복잡한 함수가 이뤄질 텐데, 더 많은 사람들과 어려운 문제를 풀텐데 그래서 더 재밌겠지 라며 진로를 상상한다. 나는 1년 뒤 어떤 걸 팔고, 어떤 세일즈를 하고 있을까. 완전 망한 첫 세일즈 시작부터 오늘 이곳까지 얻은 가장 큰 배움은 커리어에서 행운 당첨을 바라거나 내 짬밥을 넘어서는 일에 함부로 부딪치지 않고, 나를 지키기 위해 정직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차근차근 무언갈 쌓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세운 것이다. 큰 문제를 풀고 싶으면 인수분해 하여 작은 문제 부터 시작하면서 점차 쌓아가야 한다는 것도. 어쨌든 0에서 1을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운데 요즘 세일즈 경력에서 적어도 1은 만든 거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