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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ooBoo Jul 15. 2023

20년 전에 살던 집(방)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재테크 02. 지금 보니 생각보다 별 것도 아니었던 그 시절 가난

1999년 여름.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지금의 우리 부모님 세대인 5060에게 가장 힘들었던 과거의 한 시점이 언제였는지 묻는다면 대부분 1997년 말부터 시작된 IMF 외환 위기 시절을 이야기할 것이라 생각된다. 나의 부모님 역시 그렇다. 이 시기를 제대로 버텨내지 못한 사람들은 힘들어졌다는 수준을 넘어서 가정 자체가 풍비박산 나버렸다. 우리 집 역시 그중 하나였다. 우여곡절 끝에 나와 우리 가족은 원래 살던 마산을 떠나 진주라는 곳으로 떠밀려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방 셋에 적당한 크기의 거실, 베란다를 가진 아파트에 살다가 갑자기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도시의 작은 달셋방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부모님께 물어보니 보증금 300만 원에 15만 원 월세였단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 달셋방 : 월세 집, 방의 방언



불법 개조된 방 두 칸을 빌렸다


당시의 나에겐 너무나 평범했던 집 안과 밖의 풍경과 분위기를 조금 떠올려 봤다. 전형적인 80년대 주택이었다. 당연히 입구는 초등학생인 나조차도 머리를 약간 숙여서 들어가는 튼실하지만 녹이 여기저기 보이는 거대한 철문이다. 이 집은 방 5개에 큰 거실과 별도의 부엌 공간이 있었다. 이 시대의 집들이 가진 특징인지는 모르겠는데, 대문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곳은 마당이고 거기서 계단을 4칸 정도 올라가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살기로 계약한 곳은 5개의 방 중에서 2개를 별도로 분리한 뒤, 주인집 입구와는 다른 쪽으로 입구를 하나 뚫어서 만든 집이자 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히 불법 개조된 방이다. 각 방에 들어가면 두툼한 벽이 있었다. 만져보면 과거에 주인집에서 사용했던 방의 문이 흔적이 느껴진다. 대충 방음재와 두꺼운 벽지로 마감해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영화 기생충에서의 주인집처럼 엄청난 부자의 집은 아니었지만 주인집과 우리 가족이 살게 된 방과의 차이는 고작 대충 마감된 벽 한 뼘을 두고 있지만 꽤나 크게 느껴졌다. 나의 기억이 흐릿해서 부모님께 다시 물어보니 집이야 어떻든 주인집 어른들은 정말 좋은 분이셨다고 한다.


그래도 방이 두 칸이어서 부모님과 나, 동생은 별도의 공간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 여름이 아닐 때는 큰 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잤던 것 같다. 책상이나 장난감 등 나와 동생의 물건과 부모님의 물건이 분리된 공간에 있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집은 항상 깨끗했다. 아주 작은 공간이었지만 최소한의 물건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집이라 더러운 방에 살았다는 기억은 전혀 없다. 그때도 지금도 엄마의 집 청소와 정리 수준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



원래는 주인집 거실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가 살게 된 이 집은 주인집 쪽이 아니라 반대 편으로 억지로 만든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는 어른 1명이 들어가면 거의 꽉 차는 정도의 그럴듯하게 만든 부엌과 씻을 수 있는 1미터 남짓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필요할 때 물을 데워 쓰는 보일러가 붙어 있었기에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당연히 샤워기 같은 건 없다. 대야에 물을 받아서 사용하거나 그냥 수도꼭지에 호수를 꽂아서 대충 사용했다. 방 2개와 작은 부엌 그리고 1미터 공간의 씻는 공간. 이것이 실내 공간의 전부다.


평범한 집을 생각한다면 꽤 많은 것이 없어 보인다. 일단 세탁기는 밖에 있었다. 당연히 집에 놓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화장실도 밖에 있다. 불법 개조이기 때문일 거다. 과거 80년대 주택들은 외부에 별도의 화장실을 두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 화장실을 우리 집이 사용했다. 공용 화장실이다. 당연히 푸세식이었고 외부에 있다 보니 아무리 깔끔하게 청소를 해도 냄새가 나고 깨끗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 집에서 좋은 추억과 기억들이 대부분이지만 화장실만큼은 조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비 오는 날의 기억


요즘 우리나라의 날씨는 마치 동남아시아처럼 스콜과 같이 많은 비가 한 번에 때려 붓고 그치기를 반복한다. 순간적인 강수량이 100mm를 넘어가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 이 때문인지 침수 피해가 더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지금과 같은 강수 수준이었다면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힘든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도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입구까지 물에 잠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방에 물이 들어온 적은 없다.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옛날 주택은 계단을 3~4개씩 올라가서 집으로 들어가다 보니 높고 우리 집은 그 방을 빌려 쓰고 있기 때문에 일단 고도는 높다. 그러나 방 사이에 연결된 공간인 작은 부엌과 씻는 공간은 계단 아래의 높이와 같아서 문제가 됐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두 개의 섬으로 분리가 되었다. 그리고 밖에 나갈 수 없다. 불쌍한 우리 세탁기는 밖에서 비는 비대로 맞으면서 반쯤 물에 잠긴 채 혼자 밖에 서 있었다. 아마 자주 고장 났을 거다. 추측인데 엄마가 아직까지 주택을 경멸하듯이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입구까지 물에 잠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밖에 계단이나 좁은 공간에서 강낭콩, 방울토마토 같은 식물들을 키웠었다. 초등학생 때 수행평가니 뭐니 하면서 학교에서 많이 시켰었는데 이후로도 혼자 취미를 들여서 종종 우유팩을 화분 삼아 키우곤 했다. 강낭콩이 잘 익었을 때 수확해서 엄마에게 가져다줬더니 밥에 넣어줘서 홀라당 먹어버린 기억이 난다. 콩 하나 심어서 한참을 길러야 4~10개 정도 수확할 수 있었다. 가성비는 하나는 정말 구렸다. 때때로 비가 오는 날이면 이 친구들도 비를 피해 어디론가 외출을 했는지 모두 사라지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좋은 기억들


주인집은 몰티즈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강아지를 한 마리 키웠다. 더럽게 짖어대긴 했는데 그래도 꽤나 귀여웠다. 당시에 몰티즈 같은 강아지를 키우는 집은 좀 더 잘 사는 느낌이 났던 것 같아 나중에 나도 강아지 한 마리는 꼭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아직도 꼬리나 귀에 리본 같은 게 달려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병아리를 키웠었다. 당연히 학교 앞에서 파는 불쌍한 병아리들이다. 두 마리를 키웠는데 한 마리는 개가 물어 죽였나 고양이가 물어 죽였나 해서 날개에 피를 흘리고 죽어 버렸다. 집 앞 밭에 묻어 줬다. 나머지 한 마리는 날개 색이 갈색이 될 때까지 키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아빠가 어디로 데리고 갔던가. 잡아먹진 않았겠지. 병아리 먹이 줄려고 쌀이랑 콩 같은 것을 빻아서 가루로 내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병아리들은 입이 작고 약해서 알갱이가 너무 크면 못 먹는다고 하더라.


학교 정문에서 팔던 병아리 2마리를 데리고 와서 꽤 잘 키워냈다


게임을 잘했다. 1999년은 스타크래프트의 확장판인 브루드워가 나온 해이고 이때부터 PC방 붐이 일기 시작했다. 하루 용돈을 300원인가 500원인가를 받았는데 이걸 모아서 피시방에 다 가져가 바쳤던 기억이 난다. 나름 친구들 사이에서 게임을 잘하는 축에 속했기에 여러 친구 무리들과도 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열심히 게임을 했던 것 같다.


공부도 줄곧 잘했다. 어릴 때 했던 선행학습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내내 놀면서도 항상 상위권이었다. 4학년이 되니 다른 친구들과 비슷하게 맞춰져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항상 논밭을 보면서 자랐다. 봄 여름은 작고 푸른 벼와 다양한 식물들 그리고 가을에는 노랗게 익은 벼가 수확되는 모습을 봤다. 식물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20년 전에 살던 집을 다시 방문하다


우연히도 지금 부모님이 살고 계신 동네는 20여 년 전 살던 동네와 아주 가깝다. 산책 삼아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다. 나는 20살 이후에는 항상 타지에 살았기에 가끔 집에 내려가면 주변을 거닐곤 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어릴 때 살던 동네로 산책을 가는 것은 꽤나 큰 결심을 필요로 했다.


2년에 1번 정도로 지금까지 총 5번을 방문했다. 첫 방문은 대학생일 때였고 그때부터 3번은 그저 산책 삼아 가서는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고 감성에 젖은 채 주변을 거닐다가 왔다. 20년이 지나도 많이 변하지 않은 이 동네의 모습이 그냥 좋았다. 여전히 논과 밭이 있고 아직도 그때의 건물들과 살았던 집이 그대로 남아 남아있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도 그대로다. 살았던 집의 입구까지 갔었는데 내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불법개조된 형태도 거의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누군가 또 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녹슬어 있던 대문만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4번째 방문했을 때는 주변 일대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도로도 다시 포장해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어릴 때 봐왔던 논의 일부도 없어졌고 밭이 있던 자리는 새로운 주택이 올라와 있었다. 살았던 집은 없어지고 새 건물이 생겼다. 골목 사이사이까지 모두 정비되지는 않았지만 과거의 모습이 꽤 많이 사라졌다.


바나나킥을 자주 사 먹었던 동네 가게. 아직도 장사를 하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5번째 방문한 날은 2021년 12월 27일. 여전히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여서 그런지 많이 추운 겨울날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더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4번째 방문했던 날보다도 더 많이 바뀌긴 했지만 골목 일부에는 아직도 옛날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다. 23년 전에 바나나킥을 자주 사 먹었던 구멍가게도 찾았다. 아직까지 장사를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도 바나나킥만 사 먹으니까 엄마가 "넌 할매 할배도 아닌 게 왜 맨날 그런 과자만 사 먹느냐"라고 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자판기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생각보다"


과거에 살았던 동네가 많이 변하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름의 재테크 공부과 경제관념이 생겨서 그런 걸 수도 있다. 5번째 방문한 날 나는 내가 살았던 집터에 새로 올라온 건물을 보고 든 첫 생각은 "이 건물은 얼마일까"였다. 과거에는 "이땐 이래서 좋았지.", "추억이 있던 공간이 없어져서 아쉽다" 같은 생각만 하고 돌아갔었다. 속물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그 또한 찰나의 순간이다. 주변 일대를 살펴보고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서 주변 집터와 아파트들의 시세를 확인했다.


그리고 또 2년이 흘렀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과거의 기억을 다시 다듬어보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당시의 달셋방 가격과 주인집이 잘 대해줬는지 등을 물어봤다. 나이가 들고서야 당시의 현실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 진 거다. 결론은 간단했다.


생각보다 우리 집은 더 많이 힘들었다.

생각보다 집주인이 부자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그 집은 저렴하다.

생각보다 빨리 극복할 수 있었을 거다.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들. 다시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내 생각. 그놈의 내 생각. 가난했던 그때의 그 생각 자체를 빨리 떨쳐버릴 수만 있었다면 조금 더 세상을 만만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에 목표 중 하나가 당시의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더 높은 곳을 본 적이 없었으니 알 수가 있나.


20년.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정확하게 그 집에서 나온 지 22년이 지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근처의 다른 집 기준으로) 나는 이제 그 집을 그냥 살 수 있다. 물이 있다면 당장 내일가도 살 수 있을 거다. 내가 부자라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바로 앞의 목표가 어디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닌지 가능성이 있긴 한 건지 걱정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 목표까지 가는 건지 아직 방법도 잘 모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왠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별 거 아닐 것 같긴 하다.



《재테크 02. 지금 보니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던 그 시절 가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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