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첫 커밍아웃을 듣고 나서 생각난 두편의 영화
“나, 그를 사랑해.”
라는 말을 듣고 나는 태연한척 내 앞의 커피잔을 얼굴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이 폭탄선언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깐 시간은 벌겠지. 내 표정은 가려지려나.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아직 커피가 덜 식어서 그런가, 커피의 김이 얼굴에 올라와 안경이 흐려졌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컵에 입을 제대로 가져다 대지 않았었는지, 입 옆으로 커피가 조금 흘렀다.
봄, 지구 온난화를 알리는지 몇주는 일찍 폈던 벚꽃도 다 져가고, 계절을 잊은 황사가 시시때때로 불어오고 있었다. 벌써 성급하게 반팔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밤에는 생각보다 쌀쌀하여 반팔 티에 얇은 가디건을 입는 것이 유행인 그런 때였다. 반팔은 아니었지만 얇은 가디건에 살짝 카푸치노의 거품이 뭍은 커피가 살짝 흘렀다.
“당황했니?”
당연하지. 거기서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 커피가 덜 식었는지 뜨겁네…”
그 뒤로의 대화, 아니 한동안 대화라기 보단 한쪽에서만 말하고 나는 응. 응. 그래. 아니. 정도의 말과 추임새들을 녹음기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사실 상대가 하는 말이 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건지, 불편할 줄 알았다고 했는데 그럼 말을 하지 말던가, 내가 몰랐으면 지금과 같은 당황스런 상태도 없이 잘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런데 왜 굳이 나한테 얘기했을까. 내가 요즘 거리를 두고 있는게 티가 났을텐데 굳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하다니. 눈치가 없는 건가? 근데 주변에 누가 이 대화를 듣고 있는게 아닐까. 아니 그런거 보다도 내가 뭐라고 반응해 줘야 하지. 나름 사고방식이 쿨하고 개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는 이럴때 뭐라고 반응하더라?
어쨌든, 내가 아마 결국 했던 말은 이런 것 같다. 나는, 당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진 않을거라고.
사실 틀린 말은 아녔다. 나는 다른 이유에서 당신을 그 전부터 불편해졌었다고 느끼고 있었거든. (오해가 있을까봐 밝혀두는데, 당신이 성인인데 영화표 청소년표를 사서 입장하려고 한다거나 임대주택을 살면서 재산 상한에 걸리지 않으려고 외제차 리스한다거나 하는 꼴이 눈시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부터 인간적으로도 안 맞기도 했고)
어쨌든 그가 말하는 걸 보니 내가 그를 불편해 하고 있었던 것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치도 없긴… 하긴 눈치가 없으니까 나한테 이런 얘기를 했겠지. 어쨌든, 나는 그 것에 대해 자세히 얘기 할 생각이 없고, 대응도 마땅치 않아서 화제를 바꿔 근황에 대한 시덥잖은 이야기를 몇마디 더 하고 헤어졌다.
그 후로 좀 시간이 지나서 만났을때도 나는 그냥 시덥잖은 얘기나 하면서 대화가 다시 그쪽으로 흘러가려고 하면 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냈다. 그런 얘기를 굳이 밖에서 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실 굳이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연락은 하지만 내가 먼저 굳이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아직도 원래 싫어했던 이유때문인지, 아니면 그때 들었던 말때문인진 잘 모르겠다.
영화 두편을 봤다.
캐롤과 나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라는 영화였다. 보고 나서 보니 둘다 동성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였다.나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라는 영화야 초반에 하도 센세이션한 반응으로 동성애를 다룬 영화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캐롤은 전혀 동성애 영화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런 정보없이, 그냥 라이브톡 영화라기에, 당일날 빨리 끝나서 표가 남아 있길래 봤다.
맨 처음으로 극장 맨 앞줄에서 영화를 봤는데, 생각보다 볼 만 했다. 발을 맘 놓고 뻗을 수 있는 점은 좋았다. 어쨌든 돌아가서…
나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자극적인 장면은 많았지만 나는 그 둘의 사랑이 아름답거나 예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영화는 지나치게 길고 서로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왜 갑자기 다투고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내가 영화관에서 본게 아니면 집중력이 크게 떨어지고, 게다가 너무 길어서 두번에 나눠 쪼개봐서 그럴 수도 있다만. ★★★
캐롤은 그에 비하면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다. 단순히 화면이 예쁘다거나 배우가 아름답다는 얘기가 아니다. (물론 루니 마라와 캐이트 블란쳇은 아름답다. 루니 마라도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케이트 블란쳇은 우아하며 귀족적이고 고혹적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예전에 금요일엔 수다다 라는 영화 프로그램에서, 박보영이 게스트로 나왔을때 (사실 나는 금요일은 수다다 의 이 31회를 보고 박보영을 처음 알았다.), 박보영이 이동진에게 평론가로서 영화를 어떻게 하면 깊게 볼 수 있는가? 라는 식의 질문을 했을때 영업 비밀인데 박보영이 와서 최초로 공개한다면서 이렇게 답했다.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 그 카메라가 왜 거기에서 누구의 시점에서 누구를 보고 있는지를 상상해보라고.
캐롤을 볼때, 처음으로 영화를 보다가 아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며 보라는게 이 소리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 둘이 차를 타고 캐롤의 집으로 갈때, 그리고 마지막의 그 말할수 없는 장면에서 정말 카메라가 누구의 시점에서 누구를 보고 있는지가 왜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음…뿌듯했다.
뭐 나의 뿌듯함과는 별개로 영화가 그런 식으로 적절한 카메라 워킹과 구도, 색감과 배경을 이용해 둘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 등등이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이 되어 있어서 좋았다. ★★★★☆
사실 어느 순간까지는 테레즈의 성장영화인가 했었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고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영화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동진이 라이브톡에서 한 말처럼, 나도 이 영화는 레즈비언 영화이지만 레즈비언 영화라는 것에 중점을 둔게 아니라 그냥 두명의 사랑을 얘기하는데 대상이 둘다 여자인 멜로 영화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반해서 나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어찌 되었든 멜로보다는 동성애를 다루려고 했던 영화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런데 이동진의 캐롤 라이브 톡에서 했다고 아까 언급했던 그 발언이, 요즘 소위 페미니즘 혹은 성평등 관점에서 적절하지 못했다고 논란이 되어 난리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영화와 라이브톡을 보고 듣고 난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정 부분만 발췌한 글이 아니라, 실제 영화와 라이브톡을 전체 맥락에서 실제로 봤으면 그런 비판을 할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걸 페미니즘혹은 성평등 관점에서 입장에서 이동진의 말이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말을 해야지 만족할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어쨌든 저 논란을 보다 보니 과연 동성애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을때만 그렇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앨런 페이지가 커밍아웃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고, 동성애자가 동성애자라는 점만으로 차별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미드 모던 패밀리에서 게이 커플의 일화를 보며 깔깔대고 웃을 수 있고,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가 커밍아웃한 것을 적극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년 비엔나 의 시청사에서 LGBT 축제를 하는데 직접 남자들이 딥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은 뭔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여-여 보다 남-남일때 더 내가 느끼는 위화감이 심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나, 그를 사랑해” 라는 말을 들었을때, 그리고 그 후의 나의 대응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사실 나는 그 문장에서의 그는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나와 관계가 없으면 난 너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든 큰 신경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때 그렇게 위화감을 느꼈을까. 그냥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어서 당황해서 느낀 위화감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그가 그라서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평상시에 하고 있는 생각과 말과는 다르게, 그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싫었을까 아직도 가끔 고민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