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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inq Mar 24. 2019

내게 무해한 사람

1. 총론

이번 최은영의 글을 읽다보면 화창한 꽃이 피는 봄날이나, 뜨거운 여름, 혹은 형형색색의 단풍이 들고 1년의 결실을 수확하는 가을이 아니라 겨울 날씨 처럼 차가운 느낌을 받는다. (전작은 가을에 가까운 느낌을 줬다) 최은영의 이번 글을 걷다보면 나의 감정이 겨울의 살얼음이 얼은 강을 건너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칼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덮어주는 새하얀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이다. 그 속에서, 나는 눈속에 남겨진 여러 발자국의 궤적을 돌아보고 얼어붙은 손을 내밀어 옆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손길을 잡아보게 된다.


이번 최은영의 소설은 과거형과 가정법이 가득하다. 최은영의 소설은 현재형의 급박함과 궁금증이 없으며 미래형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기대를 찾을 수 없다. 과거형은 확정되었고 고정되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시제이다. 가정법은 만약…이라며 현재를 부정한다. 어찌보면 최은영의 소설은 부재와 상실, 고정과 후회의 소설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소설이었다면 좋은 평가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과 생각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급박한 현재진행형에선 놓칠 수 있는 것들을 과거형은 보여준다. 가정법이야 말로 현재와 과거를 돌아보고 비교하고, 어찌보면 과거와 현재를 긍정할때 가장 적합한 시제이다. (라라랜드의 마지막 회상 장면후 나눈 눈빛들을 생각해보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상태에서 굴린 공은 영원히 굴러가지만,우리가 언제까지 끝없이 미래만을 향해 굴러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원히 굴러만 가는 삶은 외롭다고 말한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중력을, 우리를 멈추게 만드는 마찰력과 같은 위치에 놓은 것이 작가의 독특한 시선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니라 후회와 자기 반성에 가득찬 마음가짐일지라도, 그 마음가짐을 원동력삼아 멈춘 마음은 다시 굴러간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만드는 삶의 마찰력과 서로를 잡아당기는 중력의 소중함을 알고, 영원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멈췄다가 다시 나아가는 삶을 돌아보고 긍정할 줄 안다. 추억을 곱씹으러 잠시 멈추는 것을 감정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고 과거를 돌아봤다가 다시 나아갈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다.


소설속의 화자는 다양하다. 주인공들의 말을 빌어 작가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이경’은 당신을 쉽게 깨질 유리라고 생각하고, 그걸 깨지 않기 위해 점잖음과 익명성, 배려와 동정어린 태도를 가진다.

‘미주’처럼 내게 무해한 사람을 찾는다. 그러한 내 자신이 상대에게 동상을 입혀버릴 기세를 내뿜는 얼음과 같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한채.

우리의 추억은 모래성과 같아, 언젠가는 무너져 내린다. 여럿이 모래를 한 움큼씩 쌓아 올리듯, 매번 조그마한 추억을 쌓아 올리지만 결국 정해진 시간 뒤엔 밀물이 들이쳐 모래성이 세월의 바다에 씻겨 흘러갈 것을 안다.

‘혜인’처럼 남들도 겪는 일이고, 막으면 막고 닫으면 닫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당신의 작지만 따뜻한 손을 맞잡으며, 얼음과 같은 내 손길도 녹아내릴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별이기도 하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지만, 바라보는 자에겐 얼굴을 비춰줄 정도의 빛을 비춰줄수 있는 별과 같은 사람들이다.

물론 그러한 교류가 오래갈 수 없을 수 있으며, 하루하루 우리는 달라진다. 어느 순간 만남의 시작이었던 아치디를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더 함께 하고 싶었지만, 더 가자는 말을 서로 하지 않고 결국엔 헤어진다. ‘하민’처럼 꼭 계속되어야만 좋은 것은 아니라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기도 하다. 헤어진 후 어디서든 넌 네 삶을 살게 될거야 하며 헤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희’가 입이 막힌 것 처럼, 남에게는 아무렇게나 하는 말인데 당신에게는 쉽게 나오지 않는 그 말. 우리가 함께 했었던 것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2. 각론

#1

시골의 조그마한 강을 너무 큰 물이라고 이상해하면서도 , 두려워 하냐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시간축을 벗어난 듯이 강물을 한참 바라보던 상대의


진심과, 사랑과, 그녀가 열어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나의 답변이 나만의 비밀과, 기만과, 나의 비겁함과 워선으로 가득찬 싸구려 거짓말이었더라도.


‘행복했었어. 그때만 말하는 게 아니라 너와 같이 지낸 시간 전부 말이야’ 라고 말한 사람에게, 자신이 부순 세계의 파편에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에게 끝까지 손을 뻗지 못하더라도


은지와의 기억은 시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흘러가 버렸고, 시간은 지나갔지만


뒤늦게 부른 수이의 이름만은, 그리고 미처 하지 못했던 말만은 시간으로부터 놓여나서, 회색 새 처럼 강물을 따라 날아가 어린 자신이 골똘히 바라보던 수이에게 닿았을 것이다.

라고 이경은 믿고 싶을 것이다.


#2

602-601 = 1.

겨우 1이란 숫자 차이에 불과했지만, 그 차이는 컸다. 601과 602라는 서로 다른 숫자 뒤의 철문속에 있었던 나와 효진이가 살아온 삶. 요즘 딸이 쓸모없다고 하는 경상도 칠곡의 가부장적 가정의 효진이네 집과, 수도권에서 살아온 나의 집은 1의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가부장적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엔 멀고도 넓은 복도와 두개의 문으로 가로막혀 나는 기준의 폭력에서 안전히 보호받고 있었다.


사실 1이란 숫자차이는 크지 않았다. 기준의 방에 가득한 매운 공기를 막기엔 1988년의 한국 광명 신축 주공아파트의 복도는 너무나 좁았다. 수식어를 수의처럼 입은 엄마에게서 수의를 벗겨주기엔 남향거실에 고인 밝은 꿀빛 햇살은 너무나 약했다. 남향 거실에 꿀빛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밤마다, 그 매운공기를 씻어내기 위해 나의 엄마는 매일 세면대에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3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바닥을 바라보는 너에게 말을 걸지 못했던것을 내내 자책하면서도, 너가 해준 밥을 먹고서도 맛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못난 어른이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또 기다리고 기다리지만, 기도는 통하지 않지만, 기억나지 않는 시간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외로움을 외면한 자신을 미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너의 얼굴을 마음에 꼭 담아두고, 쌀쌀한 바깥 바람을 막기 위해 이불이라도 덮어주기 위해 옆에 있는만큼의 작은 빛을 내며 지나가는 밤.


#4

왜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프레임 밖으로 나갈 듯한 피사체를 간신히 잡아내는 마음과

피사체를 포착할 시간과 빛이 부족해서, 너무나 멀리 있는 상대를 간신히 확대해서 잡아내는 마음과

하늘의 명도가 낮아지다 못해 칠흑의 밤이 될때까지 단 한 장면을 찍기 위해 기다리던 마음이 섞인 메모리.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을 좋아했다가, 변하기 싫어져서 사진의 어느 순간에 영원히 남고 싶은 마음이

다시 ‘사람은 사라져. 사라지지 않는 사람은 없어. 사람의 물질성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라고 변할지라도

중력과 마찰력이 없는 영원히 굴러갈 외로운 구 보다는,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것을 긍정하는 마음이 있는 한


너희가 내게 줬던 시간과 마음은 영원할 것을 그녀는 믿는다.


중력으로 끌어당겨진 내가 중력의 중심이 되는 것을 거부하더라도. 아무리 사랑이 불완전하고, 서로의 불완전함때문에 사랑하더라도. 한 쪽이 더 사랑하고 한 쪽이 덜 사랑하더라도. 그것을 알면서도


‘좋다’

‘참 좋네’


#5

가정법과 과거형의 매력을 보여주는 고백이라는 소설을 보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소설의 주제와 핵심재제만을 보던 미주와, 인물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진희.


진희가 겉으로는 둔감해 보여도 누구보다 예민하다는 것만으로 진희를 이해한다고 생각한 미주는 사실 진희를 모르고 있었고 ‘진희는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 안에 있던 것이 쏟아지지 않게 막고 있던 진희의 손을 맞잡지 않고 놓아버리고, 경멸의 시선을 가득 담아 정말이야? 라고 진희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면서도 탄생을 축하한 무의미한 말을 던져 진희를 진저리치게 만들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진희의 옆을 걷기는 커녕 떠나가 버린


자신의 유해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주나의 ‘정말 역겹다.’ 라는 말은 과연 진희한테 한 말이었을까?


우리는 당신을 알고 싶어하는 만큼이나, 당신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누구보다도 유해할 수 있다. 연민과 연인은 단지 자음 하나 차이이지만 도저히 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동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나를 모르지만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기대고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이다.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을 동정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 딱 그만큼이 위안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알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이다. 구원이니 천국이니 하는 신의 세계보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세상의 비를 막아줄 각자의 우산을 쓰고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에겐 더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라는 화자의 말을 빌어서 사람간의 관계를 긍정하고, 용서해주고 있는 것 같다.


# 6

‘나는 항상 네 편이야. 세상 모두가 널 떠나도 난 네 곁에 있을꺼야.’ 란 말을 하고 떠나간 오래된 타인이 있었다. 이정도 이별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니까,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이 겪는 일에 비하면 이런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나만 겪는 일인 것처럼 유난 부리지 말고 연연하지 말자며 지내왔었다.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


말과 마음은,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던 그날,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인간들이 모여, 희미한 촛불들로 광장을 밝힌 그 날 나는 다시 오래된 타인을 만났고,


‘어두운 쪽에선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왜 밝은 쪽에선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잘 볼 수 있을텐데.’ 라는 말을 한 오래된 타인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이목구비가 어렴풋하게 보이는 정도의 조도와 거리. 얼굴에 내리는 아주 희미한 빛 정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자신때문에 가슴아파할 수 있던 그 사람의 손은, 자신의 얼어붙은 손을 다 녹일 정도로 뜨거웠으며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음을 기억할 정도. 딱 그 정도의 아주 희미한 마음가짐.


#7

대서양을 건너온 브라질 남자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동양의 여자는 화산이 폭발해 아이슬란드가 고립될 정도의 천재지변이 아니었으면 만날 일이 있었을까.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의문을 가진 남자와, ‘항상 열심히만 살아왔’던 여자는 출신 대륙 만큼이나 너무 달라보였다.


하지만 대마초의 힘을 빌려 방안에 자신의 육체를 가두던 남자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가두던 여자는 생각만큼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죽여버린 여자는, 바르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차가운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자신의 이상을 눈치챘고,남자답게 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살아온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게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털어놓고 나서야 자신만의 방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다.


한심하게 살기 위해서도 엄청난 힘을 내야 하는 사람과,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고 남은것은 자신에 대한 미움뿐인 사람은 서로에게 해 줄 위로가 없어 보였다.


위로는 없었지만,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가장 깊은 것을 공유하고 그 곁에 침묵하며 단지 서서 지켜보며 걸음을 늦춰줄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얘기를 하고, 그 얘기를 서서 지켜봐 주며 스스로의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나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정도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야 겠다고 맘 먹어도 눈을 보고 말 소리를 들으면 소용이 없어지기에 먼저 떠나는 여자와

상대가 우는 것을 알아도 끝내 위로를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생각을 하지만 근처까지 가서도 끝내 가지 못하는 남자는


‘꼭 계속되어야만 좋은 건 아니야. 넌 네 삶을 살거야. 하지만, 그냥 고마웠어.’ 라는 말과 함께 기차가 선로를 달리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목적지를 향해 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는 떠났지만 소리는 남았다.


당신은 떠났지만 추억은 남았으며, 그 추억이 구르다가 멈춰버린 나를 다시 구르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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