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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후 Nov 08. 2021

작은 일탈이 주는 혁신 - 샴푸 뚜껑의 비스듬한 홈

작은 차이에서 오는 혁신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나는 뚜껑을 따는 게 힘들다.

일상의 소소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한다. 나는 손아귀 힘이 약한 편이다. 뚜껑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서 따야 하는 잼 뚜껑이나 2중 밀봉이 되어 있는 탄산음료 뚜껑은 나를 항상 힘들게 한다. 돌려 따는 것 말고 위로 올려서 따는 뚜껑도 나를 힘들게 한다. 피부가 연한 것인지 압력에 약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단단하게 닫혀있는 뚜껑을 열 때면 항상 손이 아프다. 나를 굉장히 힘들 게 했던 잼의 병뚜껑이 있었다. ㅇㅇㅇ브랜드의 오렌지 마말레이드 잼이었다.

잼 병뚜껑은 언제나 나를 괴롭힌다.

잼 병뚜껑은 그냥 돌려 따는 것도 힘든데 이 병뚜껑에는 압축 비닐이 둘러싸여 있었다. 비닐은 어차피 힘이 없으니까 병뚜껑과 같이 돌려버리면 될 것 같았다. ‘그깟 비닐쯤이야’하는 마음으로 병뚜껑을 굳게 잡고 뚜껑을 돌렸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처음엔 다 그렇지’라는 생각으로 손에 힘을 한 번 더 준다. 역시나 미동도 없다. 손이 미끄러워서 그럴 수 있다. 옷의 팔소매를 길게 내려서 병뚜껑을 한 번 닦아 준다. 뽀득뽀득해진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한번 뚜껑을 돌린다. 움직이지 않는다. 압축 비닐이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뚜껑을 강하게 옥죄기도 하고 마찰력이 강하기 때문에 비닐의 영향이 생각보다 큰 것 같다.


잼 병뚜껑은 보기보다 강적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비닐을 뜯어준다. 사실 압축 비닐에는 사용자가  뜯을  있도록 실선 모양의 홈까지 파여있다.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었다. 실선의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틱틱 뜯어낸 다음 병목을 붙잡고 있던 비닐을 걷어낸다. 이제 뚜껑을 돌려 따는 일만 남았다. 병뚜껑을 잡고 힘껏 힘을 줘본다. 돌아가지 않는다.  차례 힘을  준다. 역시나 돌아가지 않는다. 신경질이 조금 난다. 아내가 옆에서 “내가 해볼까?”라고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해주는  고맙긴 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나보다 힘이 약한 것도 사실이다. 짧은 순간,  호의를 살짝 무시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자존심이다.  전체의 근력과 손아귀 힘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포기하기엔 이르다. 일단, 끝까지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바닥에 앉는다. 양반 다리를 하고  병을   사이에 끼운다. 마찰력을 최대한 끌어올려볼 심산이다. 손에 물기가 없는지    확인한다.  손으로 병의 몸통을 잡고  손으로 병뚜껑을 잡는다. 그리고 힘의 분산을 막기 위해 몸을 웅크린다.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제 있는 힘껏 뚜껑을 돌린다. 마찰력이 제대로 올라왔다. 병뚜껑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짜릿함에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며 힘이 더해진다. 승부는 끝났다. ‘~’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면서  병이 개봉되었다. 손이 얼얼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의기양양하게  병을 내려놓는다.  병뚜껑을 따는  힘들지만 오렌지 마멀레이드 잼은 언제나 맛있다. 잼을  먹고 나서 병뚜껑은 살짝 닫아놓는다.


나를 괴롭히는 물건이 하나 더 있다.

나를 괴롭히는 물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샴푸 뚜껑이다. 요즘 대부분의 샴푸 용기는 펌프식으로 되어 있다. 펌프 용기를 꾹꾹 누르면 관 내부의 압력 변화에 따라 샴푸액이 관을 타고 올라오는 방식이다. 그런데 두피 건강에 좋다는 일부 해외 제품의 경우 펌프식이 아닌 '위로 올려서 따는 형태'의 뚜껑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원통 모양의 병 목에 모서리가 둥글게 마감이 된 뚜껑이 덮여 있다. 동그란 모양이 보기에는 좋은데 손으로 열기에는 매우 불리한 형태이다. 잡는 부분이 충분하지 않고 홈이 작게 파여 있어서 뚜껑을 여는 게 불편하다. 희한하게도 그런 모양의 샴푸 뚜껑은 늘 단단하게 닫혀 있다. 표면도 맨질맨질해서 물기가 있으면 미끄럽다. 샤워를 할 때 손에 비누가 묻어 있으면 더더욱 따기가 힘들어진다. 그 작은 뚜껑 하나를 열기 위해 비눗기도 닦아내고 물도 털어내야 한다. 이건 단순히 손아귀 힘의 문제가 아니다. 손가락이 아프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작은 홈에 손가락을 걸고 열어야 하기 때문에 손가락이 꽤 아프다. 피부가 약한 내 탓이기는 하나 가끔은 신경질이 날 때가 있다. 그러던 중 굉장히 신박한 뚜껑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며칠을 사용하다가 발견한 사실이다. 뚜껑의 홈이 비스듬하게 파여 있는 것이다!


샴푸 뚜껑의 홈이 비스듬하게 파여있다!

시각적으로도 신박한데 기능적으로도 훌륭하다. 이전 것에 비해 힘을 덜 써도 잘 열린다. 살짝 대각선으로 파인 홈에 손가락을 밀착시키고 뚜껑을 들어 올리면 제법 가볍게 열린다. 이 뚜껑이 헐겁게 닫혀있는 것도 아니다. 뚜껑의 고정 방식은 이전 제품과 차이가 없다. 단지, 뚜껑 홈의 모양 차이가 손가락을 덜 아프게 하는 것이다. 순간 ‘아 이건 굉장히 좋은 디자인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하다 말고 감동이 물 밀듯이 밀려왔다. 단순하게 180도 가로로 파인 홈과 약 30도 정도 삐딱하게 파인 홈이 물리적으로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손가락이 밀착되는 선의 길이가 길어지고 닿는 면적의 넓이가 조금 더 넓어지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수직 방향으로만 작용하던 힘이, 대각선 방향으로도 작용하면서 힘이 고르게 분산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손가락이 덜 아프고 힘도 덜 드는 것이라고 추측된다. 물리학 전문가가 분석해줬으면 좋겠다.

이 작은 차이에 감동을 받은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샴푸와 비슷한 형태의 뚜껑을 볼 때마다 홈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참기름 병뚜껑, 식용유 병뚜껑, 샐러드 드레싱 병뚜껑 등 다양한 제품에 다양한 형태의 홈이 있었다. 그걸 보면 디자이너가 고민한 흔적들이 여실히 느껴진다. 시각적인 걸 고려했는지, 기능적인 걸 고려했는지,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만들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샴푸의 병뚜껑처럼 약간의 일탈을 통해 혁신적으로 사용성을 높인 제품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작은 차이를 통해 혁신을 만들어보자

진짜 혁신이란 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걸 제안하는 것도 혁신이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걸 살짝 비틀어서 더 큰 감동을 만드는 게 진짜 혁신이 아닐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걸 비틀어 본다는 건, 기존의 경험을 들여다 보고 불편한 점을 개선했다는 의미이다. 이건 경험 디자이너의 지상 과제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제품들이 많이 있다. 어찌 보면 숨겨진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지금 당장 주변을 둘러보자. 그리고 샴푸 뚜껑의 무책임한 홈과 같이 나를 늘 성가시게 했던 존재가 있는지 찾아보자.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비틀어보자. 지금 당장은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한 경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다. 작은 차이를 통해 혁신을 만들어보자.



일상의 소소한 디자인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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