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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Apr 11. 2023

낚시로 '큰 그림'을 그리는 남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올해 초, 남편은 베란다 양쪽 창고의 물건을 거실로 하나씩 꺼내 놓았다. 오른쪽 창고에 세차 용품, 왼쪽 창고에 낚시 용품. 낚싯대, 닐, 의자, 2미터 파라솔까지 꺼내니 거실이 가득 찼다. 평소 정리하라고 한 번도 권한적이 없어 남편의 행동은 기이해 보였다.



"나 이거 다 처분할 거야." 

"이걸 다요?" 



참고로 그분의 취미는 디테일링 세차와 낚시. 그리고 새로 추가된 취미라면 드라마 덕후.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편의 취미 중 1위 낚시, 2위 자동차 튜닝, 3위 애니 덕후 던데 남편의 취미와 비슷하다 하겠다. 세차는 기본 4~5시간, 낚시는 아침에 집을 나서면 저녁에 오고 저녁에 가면 다음날 아침에 얼굴을 볼 수 있다. 



차에 맨손으로 왁스를 바르듯 나를 닦았으면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났으려나? 아니 낚시하는 시간만큼 내 마음을 낚았으면 애정이 뿜뿜 했을지도. 불과 2년 전까지 약간의 불만을 안고 살았다. 그러나 나는 가지 말라고 남편에게 투정을 부린 적 없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에 숨 쉴 구멍 두세 개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덕분에 남편 회사에서 나는 '조선시대 여인', '보살', '천연기념물'로 불리게 되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세차를 그만두시겠다고요? 낚시 용품을 모두 파시겠다고요?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거짓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그의 휴대전화는 "당근, 당근"을 외쳐댔다. 하나 둘 창고가 비워질 때마다 기쁜 마음보다는 왠지 모를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말 괜찮겠어요? 세차랑 낚시 안 다녀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가족 취미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 애도 많이 컸고."

"오오~ 생각한 건 있고요? 같이 도서관 다녀도 좋고 배드민턴이나 자전거도 좋고 음... 등산 어때요?" 

"다 생각이 있어. 일단 이것들 좀 다 처분하고."



-가족 취미-라는 말에 잔뜩 들떠서 조잘조잘거렸다. 남편의 통장이 두둑해질 때마다 나는 열심히 가족 취미 활동을 검색했더랬다. 아주 해맑게. 남편이 그리는 큰 그림을 모르고 혼자 설렜다. 바보같이.




창고 두 개가 말끔하게 비워진지 일주일 후, 집으로 택배들이 배달되었다. 하루에 4~5개 박스들이 현관에 차곡차곡 쌓였다.

"이게 다 뭐예요?"

"우리 가족의 새로운 취미지."

택배 상자들의 배를 쭉쭉 가를 때마다 닐이 나오고 추가 나오고 가짜 미끼들이 줄줄 나왔다. 낚싯대 3개가 한꺼번에 배송되었던 날, 나는 기가 막혀서 남편을 쳐다봤다.



"아니 낚시 안 한다고 용품 다 팔 때는 언제고 이게 다 뭐야."

"내가 했던 낚시는 원투낚시라고 던져놓고 앉아서 걸리면 잡고 아니면 바다멍 때리고 하는 거였잖아. 이건 루어낚시라고 던지고 감고, 걸어 다니면서 하는 낚시라 자기랑 후니도 하면 재미있어할 거야."

"헐... 자기가 말한 가족 취미가 낚시였어요? 아이고 두야." 

찬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딱 10번만, 아니 딱 5번만 같이 가보자. 내 거 말고 자기랑 애랑 쓸 낚싯대도 좋은 걸로 샀어."

"그러면 딱 5번이에요. 5번 다녔는데 고기도 못 낚고 재미없으면 그땐 내가 하고 싶은 취미 찾을 거예요. 다른 말하면 안 돼."

사슴 눈망울처럼 빛나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맘이 약해졌다. 옆에서 아들까지 새로운 낚싯대를 던지는 시늉을 하며 언제 갈 거냐고 물었다. 아들은 다 아빠 편인가. 두 남자가 쿵작이 탁탁 맞았다. 



그렇게 나는 꽃 피는 봄날 남편이 쉬는 날이면 곱게 도시락을 만들어 낚시를 따라나섰다. 남편이 큰 그림을 그리면 나는 더 큰 그림을 그리겠다는 각오로. 여수, 군산, 목포를 다녔지만 예상대로 4번 모두 고기를 구경하지 못하고 두 남자는 풀이 죽었다. '이럴 줄 알았어.' 나는 속으로 웃었다는 건 안 비밀. 



드디어 약속한 5번째 낚시를 가는 날. 기필코 뭐든 낚아 보겠다는 남자들을 위해 무스비를 만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잊고 있었다. '뭐든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완도? 해남? 둘 중에 골라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잡고야 만다."

"어디가 더 가까워요?"

"둘 다 비슷해. 2시간 좀 더 걸릴 거야."

"어디든 아이 낚시하기 안전한 곳으로 가요."

운전대를 잡은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나는 못 잡아도 되니까 아빠가 고기 잡는 거 한 번이라도 보면 좋겠다."

보조석에 앉아 있는 아들이 벨트를 매며 풍선 힘 빠지는 소리를 뱉었다.

"눈먼 고기 만나길 기도해 봐."라고 내가 말하자 아들은 피식 웃었다. 2시간에 걸쳐 도착한 곳은 완도 신지면. 광어 양식장 주변으로 뻗은 하얀 파이프에서는 하얀 물줄기가 작은 폭포수를 만들었다. 낚시채비를 마치고 남편이 갯바위를 타는 동안 나는 아이가 캐스팅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 낚싯대 끝에 달린 형광색 미끼가 물속에서 꼬리를 흔들며 물고기들을 유혹했지만 소용없었다.



계절을 잊고 산에서 내려온 모기가 몸에 붙을까 봐 나는 아들의 옷을 털어댔다.

"엄마도 옆에서 같이해요."

"모기 때문에 도저히 못하겠어." 그렇게 2시간이 흘렀다.

"여긴 포인트가 아닌가 봐. 방파제 쪽으로 옮기자." 



방파제에 도착해 물속을 보니 눈앞에 숭어 20여 마리가 노닐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 남편의 눈에서 광기가 번뜩였다. "내가 바다에 들어가서라도 한 마리는 무조건 잡는다." 숭어는 루어 미끼를 물지 않는다. 훌치기로 잡아야 하는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팔뚝만 한 고기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6개의 눈이 지켜만 봤다. 아이는 아쿠아리움 안 가도 되겠다며 초긍정 모드였으나 남편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채비 용품이 든 가방을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 정신이 없었다.



이미 모기에게 8방이나 물린 나는 포기하고 차에 들어와 책을 폈다. 반 페이지쯤 읽고 있을 때 "우와" 하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남편의 손에는 60cm 숭어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입이 귀에 걸린 그는 어서 사진부터 찍어라, 내가 잡는다고 했지, 이 맛에 낚시를 다니는 거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였다. 해석이 불가능한 방언과 함께 아들의 속사포 추임새가 아빠의 흥을 돋았다. 생전 첨 해보는 훌치기에 눈먼 숭어가 걸릴 줄이야. 그 뒤로 남편은 볼락, 우럭을 차례로 낚았다. 아들도 작은 고기를 잡고 방생하며 낚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나는 두 남자의 함박웃음을 연신 폰에 담았다. 두 팔을 득득 긁으면서.



"오길 잘했지? 내가 4년 동안 낚시 다니면서 가장 신나는 날이었네."

"엄마 저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아빠 최고." 아이가 잠들자, 왜 하필 가족 취미를 상의도 없이 낚시로 선택했는지 내가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이라고 말했을 남자가 말이 길었다. 혼자 낚시를 다니면서 가족끼리 다니는 사람들 보며 많이 부러웠다고. 세차는 포기하겠는데 낚시는 포기가 어려웠다고, 평일에는 혼자 다닐 테니 주말에 휴일이 겹치면 아이랑 같이 다녀보자고, 정 재미가 없으면 책이든, 운동이든, 등산이든 병행해도 괜찮단다.




2년 전부터 남편의 회사 동료와 지인들의 무거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별거와 이혼을 선택한 부부도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병으로 젊은 나이에 가족을 떠난 아내들의 이야기가 가장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에게는 가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곁에 있을 때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걸. 가족과 함께 더 많이 웃고, 행복감을 축적시켜야 한다는 걸. 남편의 노력에 힘입어 나 역시 변화를 줘야겠다고 집으로 돌아오며 마음을 다졌다.



커다란 도화지에 반을 갈라 각자 그림을 그리면 우리의 결과물은 뻔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은 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남편이 그리는 배경 앞에 나는 산과 호수를 채워 넣는다. 아늑한 통나무집이 완성되면 꽃밭 속에 뛰노는 아이와 강아지도 번갈아 그려본다. 먼발치에서 그림을 감상하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쓱쓱 덧칠하면 된다. 서로 충분히 기다려 준다면 함께 그리는 그림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결혼 12년 차에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첫 붓질은 '낚시'로 시작하였으나 끝은 '독서'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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