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오늘 그 아저씨 얼굴을 정면으로 봤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남편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날 보며 신발을 벗었다.
"누구요?"
"그 있잖아. 지하 주차장에 내가 궁금해했던 사람."
지하 주차장이라는 말에 남편이 주차할 때마다 '누군지 얼굴 한번 보고 싶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사는 지하 주차장에는 주차 라인이 넓은 공간이 서너 개 있다. 다른 곳이라면 장애인 주차 공간으로 지정해 만큼 양쪽으로 충분히 여유가 있어 운전자들이 탐내는 자리다. 남편 또한 차를 아끼는 사람이라 이 자리가 나오면 '오늘은 운이 좋네'라며 좋아했다. 물론 작년까지의 일이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자리는 고정 주차 공간이 되어버렸다. 2인승 소형차와 검정 suv, 낡은 1톤 트럭이 번갈아 그 자리에 있었다. 물론 나는 운전을 하지 않기에 누가 주차하면 어때라는 태도였지만 남편은 달랐다. 주차 황금 공간은 언제나 3대가 번갈아가며 주차되어 있다고 '분명 같은 사람일 거야'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차가 옆에 대형차들이 주차하지 못하도록 사선으로 틀어져 있다는 데 있었다. 3대의 차는 마치 칼군무를 하 듯 오른쪽 앞바퀴로 라인을 밟았다. 여긴 내 땅이니 넘어오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처럼.
"분명 삐딱한 사람이야. 진상이다 진상" 남편이 이렇게 말해도 무한 긍정 마인드인 나는 "지하에 주차 힘들면 지상에 주차해요."라고 가볍게 받아쳤다.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라 지상으로 걸어 올라오는 일이 불편해서 더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차장은 늘 협소했다. 밤이면 이중 주차가 허다한데 명당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양심불량 빌런 차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남편이 얼굴을 봤다는 건 바로 그 빌런 차주였다. 예상대로 한 사람이 3대의 차를 소유하고서 자리가 빠질 때마다 교대로 차량 알 박기를 시전 했단다. 두고 볼 남편이 아니었다. 시동을 끄고 내리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주차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라인 안쪽에 주차를 해달라고 말하니 알았다며 자리를 피했단다. 남편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했을지 눈에 그려졌다. 등치도 등치지만 불의를 보면 활활 타오르는 남자라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말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랄까?
"어땠는데?"
"50대 후반 정도. 고집 있어 보이긴 하더구먼. 다음에도 그러는지 두고 봐야지. 자꾸 저러면 참 교육을 시키던가"
"자기가 교육자는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민원을 넣었을 것 같은데..."
남편의 약한 경고(?)에도 빌런차들의 앞바퀴는 여전히 삐딱선을 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지하주차장에는 또 다른 빌런이 등장했다.
"엄마야~ 저 사람 뭐야?" 나는 뒷좌석에서 내려 지하 주차장을 두리번거리다 화들짝 놀랐다. 차 앞에 주차된 흰색 suv 때문이었다. 차량 뒷좌석 그것도 팔걸이를 내려놓는 중앙에 검은 형체가 떡하니 앉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은 놀란 내 팔을 끌고 지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사람 보고 놀란 거지? 얼마 전에 이사 온 것 같은데 저 남자 꼭 뒷자리에 앉아서 병나발 불고 있더라고. 편하게 집에서 술을 먹든지 하지 원."
"저렇게 술 먹고 혹시 운전대 잡으면 어떻게? 너무 무섭다."
"설마 그러겠어? 뭔가 사연이 있겠지."
남편이 갑자기 관대해진 건가. 그때부터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야. 좋지 않은 뉴스를 너무 많이 본 거야.' 잠들기 전, 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던 아저씨의 잔상을 지우려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어제 아침 나는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경비 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 앞에 떡하니 서있는 두 남자를 보았다. 아침부터 얼굴이 벌게진 남자는 눈에 초점이 흐렸다.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는 남편이 얼마 전 만났다던 차량 알 박기 장인이 분명해 보였다. 쌈닭들처럼 깃을 잔뜩 올린 남자들 곁에 경비 아저씨는 손에 쥐고 있는 휴대전화를 올렸다 내렸다. 먼발치에서도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삐딱하게 주차한 차량 앞에 이중 주차를 해버린 흰색 suv 남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량 뒷좌석에서 앉아 있었나 보다. 차를 빼달라는 남자의 말에 차를 빼다 알박아 두었던 차를 긁었단다.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거냐 목소리를 높이는 남자와 안 마셨다고 우기는 남자. 왠지 알 박기 남자가 더 유리해 보였으나 경비 아저씨는 그러게 왜 매번 삐딱하게 차를 주차하냐며 한소리를 보탰다. 두 빌런들과 경비 아저씨의 목소리가 아파트 단지에 쩌렁쩌렁 울렸다. 주변을 지나던 주민들이 그들의 얼굴을 힐끔힐끔 확인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꼴불견주차남과 차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 경찰과 보험사가 뒷일을 처리하겠지만 꼭 정당한 처벌을 받길 바라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두 빌런이 만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혹여 이들이 무고한 주민들과 노약자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최근 들어 부쩍 증가하고 있는 주차 빌런과 음주 운전 하루빨리 해결되어 사람들이 스트레스받지 않기를. 더 이상 빌런들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이사를 선택하는 편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