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존재.
가장 먼저 교실 문을 여는 아이였다. 교무실 미닫이문을 밀면 왼쪽 벽면에 툭 튀어나온 못들이 줄지어 박혀있었다. 0601, 0602, 0603... 죄수 번호 마냥 반 숫자가 적힌 열쇠가 못에 목을 걸고 달랑거렸다. 출석부도 당번 대신 내가 챙겼다. 아무도 없는 교실의 적막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남자아이들에 의해 깨졌다. 나는 누가 교실에 들어오든 좀처럼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엉덩이의 힘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승희는 가장 마지막에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였다. 이르면 1교시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늦게는 3교시 막바지에 드르륵 소리가 났다. 문을 여는 건 분명 작은 손이었는데 닫는 건 늘 승희 엄마였다. 그녀는 교단에 서 계신 선생님께 연신 고개를 주걱 거리며 딸에게 어서 앉으라는 듯 손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바짝 마른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승희가 왜 늦게 등교를 하는지 말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 위로 뜬소문이 먼지처럼 쌓였지만 그때뿐이었다. 막연히 몸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운동장 조회가 있을 때, 혹은 체육시간에 승희는 혼자 교실을 묵묵히 지켰다.
봄볕이 따스히 비추던 날, 감기에 걸린 나와 승희가 단둘이 교실에 남았다. 스피커를 통해 국민체조 노래가 나오는 동안 나는 멍한 눈으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무수히 많은 팔과 다리가 이리저리 휙휙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모습이 마치 로봇처럼 일사불란했다. 승희도 운동장을 지켜보는지 자리에서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 이익~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승희가 쓰러졌다.
놀란 가슴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했다. 쓰러진 승희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발작 증상이 계속되면서 꽉 다문 이에서는 "으으으" 하는 소리가 났다. 승희를 깨우려고 몸을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다행히 복도에 계시던 옆반 선생님께서 "도와주세요."라는 내 소리에 뛰어오셔서 승희를 반듯하게 눕혀주셨다. 2분 정도 지나자 승희는 점점 의식을 되찾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승희는 툭툭 몸을 털고 일어나 책상과 의자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이제 괜찮니?" 옆에 있던 선생님의 물음에 승희는 고개만 끄덕이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승희가 쓰러진 일을 다른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야. 너희 그거 알아? 승희 그 애 귀신이 들렸데."
"누가 그래?"
"아니, 철호가 그 동네에 사는데, 승희가 쓰러져서 부르르 막 떨고, 게거품 물었다던데?"
"진짜?"
나는 직접 그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가 귀신이 씌었다는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승희를 대변해 주지도 않았다. 나 역시 이 학교에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방인이었으니까. 최대한 조용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싶었다. 부모님은 내년에 다시 이사를 계획하고 계셨으므로 지금 다니는 학교는 내겐 잠시 들렀다 가는 휴게소일 뿐이었다. 친구를 사귄 들 정들면 내 마음만 아프다는 걸 두 번의 전학으로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하교하는 길에 승희가 나를 불렀다. 그 뒤에는 여느 때처럼 승희의 가방을 메고 있는 승희 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너도 내가 귀신 들렸다고 생각해?"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말 끝을 흐렸다. 늘 잿빛이었던 승희의 얼굴은 처음으로 환해졌다.
"그럼 우리 집에 갈래?" 뒤따라 오던 승희 엄마의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무언의 압력에 이끌려 나는 모녀를 뒤따랐다. 집 근처 슈퍼에서 산 과자와 아이스크림이 내 손에 들렸다. "어서 먹어." 승희는 나와 똑같은 막대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우리는 마루에 앉아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았다.
"간질병이래. 자꾸 쓰러지는데 기억은 잘 안 나."
"간질? 처음 들어봐."
"봤으니 알 거야. 그런 거야. 쓰러져서 부르르 떠는 병."
"고칠 수 있는 병이야?"
"글쎄. 머리를 열어야 될지도."
머리를 열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소름이 돋았지만 승희는 자기가 말하고 혼자 킥킥거리며 웃었다. '너도 이렇게 웃을 수 있구나.'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건강상의 문제로 함께 뛰어 놀지는 못했지만 가끔 그녀의 집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종이 인형 놀이를 하거나 공기놀이를 했다. 그리고 몇 번 승희가 집에서 쓰러지는 모습도 지켜봤다. 그때마다 승희 엄마는 승희를 편안하게 뉘어주며 "괜찮아, 괜찮아." 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옆에 있는 내게도 "승희는 괜찮아. 곧 나을 거야."라고 하셨다. 2분 정도 지나면 거짓말처럼 승희는 일어났고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차곡차곡 쌓아왔던 이야기들은 승희의 입에서 터져 나올 때마다 나는 그저 들어주기에도 바빴다. 아빠가 떠나버린 일, 몇 번이고 이사를 반복했던 일, 동생과 자신을 돌보느라 고생하는 엄마, 전학 오기 전에 친했던 친구들. 13살 소녀의 삶은 언제 그칠지 소나기와 먹구름의 연속이었다.
"야~ 너 승희랑 놀면 귀신 붙는다. 아니 귀신이 될지도 모르지." 먼저 등교해 자리에 앉아있던 나를 보고 반장 딱지가 붙은 민수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녀석을 쏘아보았다.
"승희 귀신 붙은 애 아니거든. 아픈 애야. 모르면 조용히 해." 평소 조용하기만 하던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몇몇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부끄럽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승희 편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이런 나를 승희가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지만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승희는 그 이후로 나를 슬슬 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훌쩍 이사를 가버렸다. 승희의 남겨진 교과서와 학용품을 찾으러 엄마만 혼자 학교에 찾아오셨다. "우리 승희가 참 좋아했는데... 이렇게 또 전학을 가네. 미안해." 승희엄마는 왜 자꾸만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을까? 아픈 딸은 둔 엄마는 죄인인 걸까? 그녀는 새 공책과 색연필, 지우개, 풀 같은 학용품들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승희가 쓴 쪽지와 함께.
- 네가 나 때문에 놀림을 당하는 게 싫었어. 나는 치료를 받으러 이사를 가. 그동안 고마웠어. -
엄마가 된 지금 나는 승희와 승희 엄마를 가끔 떠올린다. 드르륵 교실 문을 열던 하얀 손, 친구들을 바라보던 까만 눈동자, 엄마 뒤를 따르던 느린 발걸음, 굳게 다문 입이 내 앞에서만 쉴 틈 없이 열렸었지. 너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치료는 잘 받았을까? 한동안 너에게서 떨어진 귀신이 내게 붙었다며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걸 네가 안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고작 몇 달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산등성이를 넘는 여름 바람에게 오늘 내 소식을 전한다. 그 시절 너를 참 많이 좋아했다고. 한 번도 서로를 그렇게 부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친구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