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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그냥 Sep 27. 2024

과학의 필요, 엄밀한 시선

과학

 오늘 읽을 책은 과학책입니다. 책을 다양하게 읽으려고 하는데요. 저번에는 고전문학을 통해 인문학적 감성을 채웠으니 이번에는 과학을 통해 이성을 채워볼 차례입니다. 저는 문과 출신이라 과학이 아주 친숙하지는 않은데요. 나이가 들면서 조금 친숙해졌습니다. 계기가 있었어요.


 여느 때와 같이 유튜브를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알고리즘 님께서 어느날 과학 영상을 추천해주더라구요. 영상 제목은 "당신이 무거운 이유" 였습니다. 갑자기 제목으로 들어오는 펀치에 조건 반사로 가드를 올리다 영상을 클릭해버렸어요. 그렇게 보게 된 영상은 과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선사해주었습니다. 제게 과학이란 학창시절에 경험한 따분하고 어려운 공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상을 보고 난 후 과학이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뀌었어요. 그저 궁금한 걸 해결해주는 속시원한 효자손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유튜브에서는 이해하기 쉽게 얼마나 설명을 잘해주는데요. 학창 시절에 이런 영상을 접했으면 제가 이과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으로 읽는 과학이 쉽기만 한건 아닙니다. 책이 유튜브만큼 쉽고 재밌기는 어렵거든요. 그래서 고른 책이 김상욱 교수님의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입니다. 교수님은 한때 TV에서 방영되었던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도 나오신 분인데요.  분의 특징이 있습니다. 과학을 과학적으로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인문을 섞어서 설명해주신다는 거에요. 비교적 쉽게 설명해주시기도 하구요. 그래서 명강의를 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만큼 책도 다른 과학책에 비해 덜 딱딱하고 쉬울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하하. 문과생이 너무 큰 기대를 했었나봐요. 이건 지식의 어려움보다는 사고방식의 차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상욱 교수님이 과학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한 전략은 확인할 수 있었어요. 교수님의 전략은 이렇습니다. 챕터 앞부분에 인문학적 내용을 넣어요. 예를 들면 알베르 까뮈의 '전락'이라는 소설을 언급하며 추락을 인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람은 왜 추락할까?' 라고 질문하며 과학적 내용으로 넘어가요. 저는 사실 이 부분이 웃기더라구요. 크크크. 어떻게든 독자들에게 과학을 친근하게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전해져서 교수님이 귀여우신 분으로 느껴집니다. 하하하.


 제가 오늘 읽은 부분은 '[중력]서로가 서로에게 낙하한다' 라는 챕터에요.  부분에서는 눈 앞에 있는 사과를 손에서 놓으면 낙하하는데, 왜 저 멀리 보이는 달은 낙하하지 않는지를 설명합니다. 어디선가 들었다시피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중력이라는 힘으로 서로 끌어당기고 있어요. 만유인력이라고도 하죠. 질량이 더 큰 지구가 중력으로 달을 당기고 있으니까 달도 마땅히 떨어져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달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니 달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은 낙하하고 있어요. 다만 수직 낙하가 아니라 휘어진 낙하를 하고 있을 뿐이에요.


 평평한 땅 위의 높은 곳에서 공을 던지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질 거에요. 그렇다면 땅이 평평하지 않고 딱 포물선만큼 아래로 휘어져있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휘어진 만큼 땅에 닿지 않을 겁니다. 우연히도 지구의 모양은 대략 원의 형태로 충분히 휘었고, 달은 계속 던져진 상태에 있는 겁니다. 본능적으로 달이 지구 아래의 우주로 떨어지지 않는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요. 그건 달이 중력에 의해 알맞게 끌어당겨지고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멀어지지 않고 지구를 맴돌고 있는 거에요.


 어렵사리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어요. 왜 중력은 '무거울 중'력일까요? 중력은 당기는 힘이라고 했는데 그럼 차라리 인력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될텐데 말이에요. 무거우니까 당기는거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어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면으로 된 옷의 네 귀퉁이를 잡고 있다고 쳐요. 옷 가운데에 약간 무거운 돌을 올려놓으면 옷의 가운데는 움푹 들어갈 거에요. 여기서 옷 위에 모래들을 뿌려보겠습니다. 그러면 모래들이 움푹 파인 돌 주변으로 빨려들어갈 거에요. 무거운 돌 쪽으로 가벼운 모래들이 끌어당겨졌습니다. 이것이 무거우니까 당겨지는 중력의 비밀이에요. 이렇게 과학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내는 재미가 있네요. 흐흐흐.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과학을 왜 알아야할까요? 당연히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과학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딱히 과학 관련 일을 하지 않는 개인에게는 직접적인 필요가 안느껴지기도 해요. 일하는데 써먹지도 못하잖아요. 그럼에도 제 직감은 과학이 개인에게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렴풋이 떠오르던 생각을 붙잡아봤는데요.


 개인에게도 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과학이 정확한 ‘관측’을 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중력 챕터에서는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얘기도 나오는데요. 당연히 우리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믿고 있지만 과거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하늘이 움직인다는 천동설이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어요. 과거에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느껴졌기 때문일 거에요. 지구가 움직이는 건 느껴지지 않고 하늘의 구름과 밤의 행성들이 움직이는게 보이니까요.


 하지만 행성을 정확하게 관측한 갈릴레오는 느낌에 의존하지 않고 당당하게 지동설을 주장했고 인정받았습니다. 지동설의 인정은 단순히 진실을 마주했다는 사실보다 큰 의미를 갖는데요. 그것은 관측을 기반으로 하는 이성적 사고가 인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사회 전체를 발달시켰습니다.


 아, 우리는 과학이 사회에 필요한 이유가 아니라 개인에게 필요한 이유를 확인하고 있었죠? 하하하. 갈릴레오의 관측적 사고가 올바른 사실 판단과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개인에게도 과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세 말기에는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이단으로 치부되어 화형을 당했습니다. 문제는 정말 이단인 게 아니라 이단일 거라는 느낌만으로 화형을 시켰다는 거에요. 올바른 사실 판단이 전혀 안됐습니다.


 아쉽게도 세월이 한참 지난 현대에도 마녀사냥은 존재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관측하지 않고 주어진 정보에 의존하며 느낌만으로 판단합니다. 그러한 판단은 꽤나 혐오의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사람들의 느낌을 자극할 수 있는 의도된 사실만을 보도합니다. 사실만 말하는 거짓말쟁이가 아닐 수 없어요. 자신들은 사실만을 말했다며 떳떳하다고 말할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저 몰랐다며 숨겨놓는 사실을 관측할 줄 알아야합니다. 느낌만으로 마녀사냥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요.


 또한, 개인의 의사결정에도 관측은 필요한데요. 라인홀트 니부어라는 신학자의 기도를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기도 제목은 ‘평온을 위한 기도' 입니다. ( 참고로 저는 무교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 문장은 짧지만 삶을 관통하는 이치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고통받고 있을까요. 단기간 내에 극적인 변화를 바라고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한껏 차오른 기대를 저버리는 야속한 현실은 품었던 욕심만큼 고스란히 스트레스를 되돌려줍니다. 평온함이 필요한 순간이에요. 또, 우리는 바꿀 수 있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을까요. 게으름, 겁, 안일함, 귀찮음과 같은 감정들은 사소한 변화마저도 거부합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만 바뀌고 있어요. 때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바꿀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에요. 그래야 평온함을 가지든 용기를 가지든 하잖아요. 이 지혜를 위해서 정확한 관측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기 위해 이렇게 긴 얘기를 했습니다. 하하하. 명확히 봐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잖아요. 그래야 바꿀 것, 안 바꿀 것을 구분하죠.


 오늘은 유난히 수다를 많이 떤 거 같습니다. 책이 인상깊었나봐요. 긴 얘기를 흥미로운 눈으로 들어준 모임원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의 질문은 제 고민의 연장선입니다. 관측적 사고를 갖는 것 이외에 개인에게 과학이 필요한 이유를 물었어요.


 한 분은 과학적 사고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해준다고 했어요. 너무나 공감이 됩니다. 수학과 연결된 과학은 공식과 법칙을 만들어냅니다. 현상에 대한 원인을 명확하게 제시해줘요.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행동을 보고 왜 그랬는지에 대해 무한히 상상하고 유추하지만, 뇌과학의 내용을 보면 호르몬과 뇌기능의 작용으로 명확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요.) 단순하고 확실한 설명만큼 의사소통의 도움이 되는 건 없죠.


 또 한 분은 엄밀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요. 과학에 대충은 없습니다. 단위를 맞춰가며 실험을 하고 가설을 검증하죠. 그 과정에서 세세하게 확인하는 훈련을 합니다. 평소에 우리는 사실 많은 것들을 범주화하여 이해합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범주화하는 건 '하루'입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삶이 재미가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해요. 하지만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생각이 같은지. 새로운 대화. 새로운 배움. 새로운 감정. 디테일을 살펴보면 우리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삶의 의미는 의지의 차이일 지도 모르겠어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엄밀한 사고를 하는 것. 생각해보니 이것 또한 관측이 기반이 되어야하네요. 첨예한 경쟁이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결과를 쫓느라 현재를 관측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책을 통해 넓은 시야로 맥락을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과학책을 읽고 엄밀한 시선으로 주변을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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