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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Dec 22. 2015

라벤나에서 하는 단상

갑자기 떠오른 짝사랑 얘기랄까.

2005년 10월 18일 월요일. 날씨 흐림.


나를 초대해준 빅토리아가 학교에 갔다가 오전 10반쯤 돌아온 다는 것을 새겨들어서 일까.

정확히 10시 15분에 깨서 눈만 감고 뒤척이는 데,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소리가 윙- 하니 들린다.

그리곤 둔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면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달그락 거리면서 뭔가 마실거리를 준비한다.

아마도 내가 자고있는 줄 알고 깨우지 않는게 분명하다.


춥다. 여긴 왜 날씨가 이럴까.

빅토리아 말로는 거의 한달째 햇빛을 보지 못했단다.

어제 도착했을 땐 험난한 여정을 거쳐서 찾아왔다는 사실 만으로도, 친구 한 명 빼곤 날 전혀 모르는 도시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뜨고 행복해서 비오는 것도 운치있게 느껴졌었는데,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은근히 날 우울하게 만드는 거 같다.

낮엔 여름같이 바짝 더워나고 햇빛이 쨍-하니 비쳐주는 로마가 그립다.

익숙한 데를 떠난 다는 게, 이렇듯 애달픈 일이었었나.

참 괜히 청승을 떤 거 같다.

머리를 식히고 맘 비우러 온 건데 이렇게 우울해 할 필요 까지야....


거실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벽에 걸려있는 큰 그림에 눈길이 간다.

어린 발레리나가 발레복을 더 타이트하게 조이는 모습.

막 어여쁘면서 가녀린 모습을 한 발레리나는 아니고, 은근히 다부진 몸매에 서툰 손짓의 십대로 되어보이는 소녀.

예전과는 다르게 그 그림을 보고 내가 발레리나 였을때를 기억해낸 것 보다는,

나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머릿속으로 따라그리는 상상을 해봤다. 상상만으로도 그림그리는 건 어렵다 나한텐...


불현듯 초등학교 시절에 은근히 짝사랑을 해왔던 같은 반 남자애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사춘기라서 그런지 자존심 강한 나와 그 친구 사이에는 이상한 오해가 생겨서 굉장히 많이 틀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뭔 적대시 할만한 일이 있겠냐만은, 우리 사이는 심할 정도로 틀어져 있었다. 거기다가 그 친구는 나와 은근히 라이벌로 불리어 지는 한 친구의 무리에 속해있었다. 그것도 나를 굉장히 기분 나쁘게 하는 요소였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와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조합으로 같은 반에 있다니...어린 나이에는 자존심도 굉장히 상하면서 은근히 가슴앓이를 만들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미술시간에 다들 운동장으로 나가서 스케치를 하게 되었다.

미술에는 잼병인 나지만 재미있는 거 같아서 열심히 뭔가를 따라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서 미술 선생님한테 다가가서 수다떨고 있는데, 그 남자애의 그림을 보여주시는 거였다.

''봐, 니가 다른 사람한테 그려진 모습이야.''라고 하시면서...

굉장히 강한 터치로 라인이 서툰 듯 하면서도 어찌보면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그게 결국은 수업시간에 내가 비스듬히 서서 뭔가를 스케치 하는 모습이었다. 순간 가슴이 심하게 쿵쾅대고, 얼굴이 달아오른 건 왜일까.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날 그려줘서? 아니면 서로 소 닭 보듯 하면서도 나한테는 관심이 있었나 싶어서? 아니면 그냥... 그동안에 쌓여있던 그에 대한 모든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느낌이라서...?


어린 나이인지라, 나중에라도 대놓고 물어보지 못하고 그 그림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도 못한채, 우리는 앙숙관계를 유지한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 다시 만났을 땐 친구들이 즉흥으로 전화를 해서 불러모은 친구들끼리의 동창회었는데, 우린 벌써 많이 자라있었고, 서먹해져 있었다. 뭔가를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기엔 아직도 쑥스럽고, 많이 어린 나이었던 거 같다. 그 그림에 대해선 우린 이미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고, 맘에 둔 얘기를 차마 숨기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내가 먼저 ''야 우리 왜 그렇게 앙숙이었을까? 참 웃긴다'' 이런 식으로만 얘기를 했던 거 같다. 물론 그때 그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 역시 까마득히 사라진지 오래 되었으니까. 그 친구도 웃으면서 ''글쎄''이런 단답형 대답을 했었고...


너무 감상적인 사람이라서 그런지, 어렸을 때 손꼽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짝사랑을 많이 해왔던 나는, 지나간 얘기 하나하나가 나를 참 부끄러우면서도 울고 웃게 만드는 거 같아서 참 행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문학소녀를 꿈꾸던 내가 왜 다른 여자애들 같이 그 가슴뛰고 설레는 일들을 하나도 일기장에 정성스레 적어두지 않았을 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 후회스러운 일이다. 아니면 그런 얘기들을 소재로 해서 피와 살을 더 붙여서 더 닭살스런 사랑 소설도 써봤음직 한테....


다 큰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그림은 그냥 그 친구 눈에 보인 대상이 나였고, 나 역시 정적인 상태로 있었으니 스케치하기에 쉬워서...등등 단순한 이유었던 거 같다. 역시 그때도 내가 너무 감상적이라서 김칫국부터 마셨나 보다. 그런들 어떠랴. 나는 정말로 감동했었고 행복했었다. 그랬기에 지금이라도 이런 추억거리 때문에 웃음을 머금게 되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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