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탄의 위대한 공학자를 만나다

쇠사슬 다리로 부탄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 탕통 걀포

by TOMO
새로운 인연을 찾으러, 본데이 (Bondey)로!

부탄에서 아침 산책의 행복을 깨닫고 나니, 파로를 떠나 부탄의 다른 지방으로 떠나는 날에도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내가 묵은 숙소인 호텔 드룩첸은 파로 마을본데이(Bondey) 마을 가운데 위치해 있다. 처음 산책은 눈에 익숙한 파로 마을을 택했지만, 다음 날엔 좀 더 용기를 내 반대편에 위치한 본데이(Bondey) 마을로 가보기로 한다.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가. 본데이 마을로 향하는 길에선 그동안 보지 못했던 파로 추(Chuu, 강)의 모습과 더불어 내가 부탄 땅에 처음 발을 디딘 파로국제공항의 모습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해발 2,000m 산지에 어떻게 공항을 만들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한 나라의 대표 공항이 이렇게 초라해도 되는지 의아했다.

"하긴, 인구 80만의 소국인 데다 외국인들의 수도 철저하게 제한해버리니 공항이 작아도 상관없겠지."

공항이 작고 사람이 적으면 어떠한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인정받으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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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에서 본데이로 향하는 길에는 파로국제공항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내가 챙겨 온 가이드북에는 파로 마을 지도밖에 안 나와있어 구글맵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구글이라도 오지 중의 오지인 부탄의 지도까지 지원을 할까 의심이 들었지만, 내가 머물던 곳에서 본데이 마을까지 향하는 길이 정확하게 나온다. 구글 맵을 써보니 8년 전 그리스에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간 기억이 떠오른다. 나름 당시 최신 기종이었던 아이폰 3GS를 가지고 구글 맵을 써서 스쿠버 다이빙하는 곳을 찾으려 애를 썼던 기억. 위치는 정확했으나 가는 길이 엉뚱해 스마트폰의 가치가 폄하받았던 기억. 기술의 발전이 정말 경이롭다고 느끼며, 기술은 이렇게 빨리 발전하는데 나는 여기서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는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핑곗거리는 단 하나.

"괜찮아. 내가 부탄에 온 건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러 온 거지. 기술을 배우러 온 게 아니잖아?"

IMG_2387.JPG 불교 국가답게 부탄의 주요산업은 농업이다
본데이 마을을 한눈에

약 2km를 걸으니 아침 일찍 고(Gho)키라(Kira)를 입고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이 보인다. 같은 아시아인이라도 눈이 옆으로 찢어지고 콧대가 낮은 내가 참 신기하게 생겼나 보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부탄 아이들의 순진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혼자 걸어서 마을을 탐방하는 외국인은 이곳에선 흔치 않을 거다. 시간 많고 금전적으로 여유 있는 실버 세대들의 여행지로 각광받는 부탄에선 더더욱.

본데이 마을은 파로 마을보다 작았지만 더 혼잡하고 생기가 넘쳐 보였다. 여행객들이 없을 땐 한산한 파로 마을과 달리 현지인들이 찾는 상점들과 학교들이 있어서 그런가. 수많은 사원과 성들을 방문했을 때보다 부탄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 같았다. 우선 본데이 마을 전체를 눈에 담아볼까. 마을 뒤편 언덕에 위치한 뻴리 굄바 (Perli Goemba)로 올라가 본다.

IMG_2468.JPG 뻴리 굄바로 향하는 언덕 아래 위치한 초르텐 (Chorten)

언덕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찾는 사람도 적은 지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아 경사가 완만하다 싶으면 무조건 올라가 본다. 부탄의 언덕이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마니다르(Manidhar, 죽은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깃발)를 지나치자 작은 사원이 나온다. 부탄 불교의 주 종파인 카규(Kagyu)가 아닌 소수 종파인 닝마(Nyingma)에 속한 사원으로, 두 종파의 쓸데없는 다툼으로 규모가 작아졌다고 한다. 뻴리 굄바(Perli Goemba)의 보물은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본데이 마을의 전경이다.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정렬된 파로와 달리 불규칙적으로 늘어선 건물들이지만 왠지 더 친근감이 가는 그런 마을, 본데이. 안개에 가려진 산들을 배경으로 펼쳐진 황금빛 논과 활주로, 환상적인 풍경 앞에 놓인 하얀색 깃발들. 이 곳이 부탄이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고 마을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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뻴리 굄바(Perli Goemba)에서 바라본 본데이 마을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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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선 공항 활주로와 마니다르(Manidhar)도 볼 수 있다.
따고 하캉(Tago Lhakhang)의 이모, 산가이 쵸모(Sangay Tshomo)

본데이 마을 한가운데는 탕통 걀포(Thangtong Gyalpo)가 세운 걸로 알려진 따고 하캉(Tago Lhakhang)이 있다. 절이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생김새 때문에 이 곳이 내가 찾는 절이 맞는지 여러 번 의심하게 된다. 절이라기보단 한국의 국립공원 곳곳에서 보이는 버섯 모양의 음식점들과 닮아 정감이 간다. 역시나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는 데다가 어제 찾은 뻬나 하캉(Pena Lhakhang)과 달리 전화번호도 적혀있지 않다. 먼 길을 왔는데 쉽게 포기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으로 절 옆의 조그만 상점에 들어가서 물어본다.

"저기, 따고 하캉에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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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데이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절, 따고 하캉(Tago Lhakhang)

마치 동네 이모와 같은 친근한 이미지의 이모가 친절하게 답해준다. 그것도 영어로.

"내가 관리인 아저씨를 불러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과연,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관리인 아저씨가 와서 따고 하캉의 문을 열어준다. 절 내부도 촬영하게 해 준 건 기대하지도 않았던 행운. 사원 탐방을 마치고 나니 산가이 쵸모(Sangay Tshomo) 이모는 나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부탄 사람들이 즐겨먹는 견과류와 함께 차를 내어준다. 이모는 자신이 환경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라고 설명해 준다. 아침엔 잠깐 가게를 보고 일과시간엔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혼자 돌아다니는 외국인은 처음 봤다며, 나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어본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부탄엔 얼마나 머물 건지. 내가 부탄의 여행 비용이 너무도 비싸다고 불평하자, 다음번에 올 땐 자기한테 미리 연락하라고 말한다. 초청인 자격으로 오면 여행사를 안 거쳐도 올 수 있다나. (하지만 이건 이모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너무도 고마워 1,000원짜리 지폐를 기념품으로 주고, 부탄 맥주인 드룩 라거(Druk Lager)를 한 병 구입한다.

"이모, 너무 고마워요. 다음에 꼭 한국 오세요!"

짧은 시간 동안 본 인연이지만, 부탄 하면 따시, 파상과 더불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쵸모 이모일 정도로 그녀가 베풀어 준 친절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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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고 하캉 앞에서 산가이 쵸모(Sangay Tshomo) 이모, 관리인 아저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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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이 쵸모(Sangay Tshomo) 이모의 가게
파로를 떠나 탕통 걀포(Thangtong Gyalpo)를 만나러

호텔 드룩첸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마친다. 3일 동안 지겹도록 봐 온 파로지만, 떠날 때가 되니 마음 한편에 아쉬움이 전해진다. 파로와 작별인사는 성대했다. 호텔에선 부탄 전통 떡을 제공해줬고, 파로는 화창한 날씨로 내 마음을 달래줬다. 부탄의 마지막 일정은 다시 파로국제공항이 될 테니, 적어도 이 날이 마지막 날은 아니겠네라고 생각하니 발걸음을 쉽게 뗄 수가 있었다.

IMG_2575.JPG 파로 마지막날에는 부탄 전통 떡도 나왔다
IMG_2579.JPG 아침을 먹고 나니 구름이 걷히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다

따시와 파상은 차를 몰고 가다 본데이 마을의 작은 상점에 멈춰 선다. 여기가 본데이 마을이라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는 따시에겐 내 아침 비밀의 여정을 숨기고 모른 체 한다. 그들이 사들고 온 건 인도산 하얀색 가루로, 우리나라로 치면 껌으로 먹는 것이다. 파상은 내 이름을 연신 외쳐대며 나에게도 가루를 먹어보라고 권한다. 처음엔 무슨 맛으로 이걸 먹는지 의아했지만, 나중엔 나도 오랜 여행 중 지쳐있을 때 몇 번 달라고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한국에 돌아와서 알아보니 내가 씹은 것은 인도에서 생산하는 굿카(Gutka)라는 것. 담배 재료가 들어가 건강엔 별로 좋진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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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카(Gutka)를 사는 따시와 파상. 언제나 아름다운 파로 추 (Paro Chuu)

파로를 조금 벗어나니, 대자연이 눈에 펼쳐진다. 미국의 그랜드 캐넌만큼 광활하고 멋진 풍경이지만, 삭막한 그랜드 캐넌과 달리 온갖 초원과 풍부한 물이 제공되는 파로 계곡. 부탄 사람들은 이렇게 멋진 자연 속에서 부처님의 보살핌 아래 살아간다. 30분 정도 운전하니 계곡 너머로 땀취혹 하캉(Tamchhog Lhakhang)이 보인다. 기암괴석 아래 지어진 절도 아름답지만, 더욱더 신비로운 건 탕통 걀포(Thangtong Gyalpo)가 건설한 철교(Iron Bridge)다.

IMG_2611.JPG 땀취혹 하캉(Tamchhog Lhakhang)
부탄 여행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 04 - 탕통 걀포 (Thangtong Gyalpo)

탕통 걀포(Thangtong Gyalpo, 1385-1464)는 티벳의 성인이자 건축가로, 티벳과 부탄 전역에 걸쳐 108개의 철교를 건설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업적에 힘입어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라마 착잠파(Lama Chakzampa, 철교를 건설하는 승려).

탕통 걀포가 부탄에 처음 발을 디딘 때는 1433년이며, 서쪽의 파로(Paro)와 동쪽의 트라시강(Trashigang)을 포함해 여덟 개의 철교를 건설했다. 철교를 건설한 이유는 강을 건널 때 과도한 뱃삯을 요구하는 사공들로 인해 서민들이 고통받자, 그들의 고충을 해결해주기 위해서라고. 그가 건설한 여덟 개의 다리 중 가장 오래 남아있던 철교는 동부 부탄의 트라시 양체(Trashi Yangtse)에 있었지만 2004년 홍수로 떠내려 가고 만다.

탕통 걀포의 업적은 철교를 건설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도 부탄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부른다는 수많은 민요와 함께 티벳의 라모 오페라 (lhamo opera)를 제작했다. 부탄의 소수종파인 닝마(Nyingma)의 드룹똡(Drubthob, Great magician)으로 추앙받으며 파로의 둠체 하캉(Dumtse Lhakhang)을 건설했다. 그의 후손이 아직도 땀취혹 하캉(Tamchhog Lhakhang)에 살고 있으며, 구루 린포체만큼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원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부탄 사람에겐 인기가 많은 인물이다.
TangtonGyalpo.jpg 탕통 걀포 (Thangtong Gyalpo)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hang_Tong_Gyal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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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통 걀포(Thangtong Gyalpo)가 만든 철교(Iron Bridge)

현재 안전상의 이유로 쇠사슬로만 이루어진 다리는 건너지 못하고, 수많은 룽다르(Lungdhar) 깃발로 뒤덮인 새 다리를 건너야 한다. 조선에서 홍수 한 번이면 쉽게 떠내려 가는 외나무다리를 만들고 있을 때, 부탄이라는 소국에서 수백 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낸 쇠사슬 다리를 만들다니.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녹슨 철교를 보면서 탕통 걀포라는 인물이 티벳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왜 부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지 알 수 있었다. 샵드룩 나왕 남걀(Zhabdrung Ngawang Namgyal)이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이순신이라면, 탕통 걀포(Thangtong Gyalpo)는 공학으로 사람들을 편리하게 만들어준 장영실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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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철교 옆으로 새로 만든 다리가 놓여있다

따시는 다리를 건너 땀취혹 하캉(Tamchhog Lhakhang)에 오르며 절 내부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고 이야기해준다. 아직도 탕통 걀포의 후손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가족 소유의 절이기 때문에 특정한 시간이 아니면 개방하지 않는다고. 부탄 국민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교를 만든 탕통 걀포를 생각하며 절의 기도 바퀴(Prayer Wheel)를 돌려본다. 이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깃발을 걸어놓은 건 부탄 사람들 또한 탕통 걀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를 기리기 때문이 아닐까.

IMG_2651.JPG 탐취혹 하캉의 기도 바퀴 (Prayer Wheel)
만남이자 이별의 장소, 추좀 (Chhuzom)

끝없이 이어지는 산 사이로 파로 강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한국의 강들도 인간의 편의를 위해 파헤쳐지고 파괴되지 않았다면 이런 태고의 모습을 간직했겠지. 어릴 때 방학마다 시골에 가면 굽이쳐 흐르는 강 위에 몸을 담그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잠시, 몇 분이 지나자 차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잠시 멈춘다. 이 곳이 바로 강이 합류한다는 뜻의 추좀 (Chhuzom). 파로 추와 왕 추가 합류하는 지점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 개의 초르텐 (Chorten, 승탑)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따시는 부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불길한 징조로 여겨 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이 곳에 초르텐 세 개를 세웠다고 설명해준다.

IMG_2728.JPG 파로에서 추좀으로 향하는 길은 최고의 드라이브 루트다

추좀 입구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을 보니 인도 국경 마을인 푸엔촐링(Phuentsholing), 수도인 팀푸(Thimphu), 파로 서쪽에 위치한 하(Haa)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표시되어 있다.

"아, 추좀은 강에겐 만남의 장소지만, 사람들에겐 이별의 장소구나!"

두 강은 이 곳에서 합류하지만, 사람들은 이 곳에서 각기 제 갈 길을 간다.

똑같은 장소가 누군가에겐 만남이 시작되는 곳이지만, 누군가에겐 헤어짐이 되는 곳이다.

여행이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도 비슷할 것이다. 즐거움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픔을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곳에 왔는가 생각을 하니 나에게 와 닿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단지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에 만족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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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추좀. 부탄의 세 마을로 나뉘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따시와 파상의 보스, 소남 초르펠 (Sonam Chorpel)

부탄 곳곳에는 검문소가 세워져 있다. 가이드는 검문소에서 여행자들의 일정을 제출해서 통행을 허가받아야 한다. 미리 짜인 일정에 검문소 너머에 있는 마을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건너갈 수 없는 것이다. 추좀도 수많은 검문소 중 하나로, 부탄에 입국하기 전 세운 일정에 부탄 중부 지역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따시는 앞으로도 세네 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며,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날 안심시킨다.

IMG_2762.JPG 추좀을 통과하기 위해선 검문소를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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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팀푸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계속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한적한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차에 앉아 있으니, 특별한 일정 없이도 황홀함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라는 걸 깨닫는다. 평화로운 부탄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가 정말 행복한 나라라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도 잠시뿐, 수도 팀푸에 점점 가까워지자 조용하고 한적했던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수많은 콘크리트 건물과 먼지로 뒤덮인 도시가 나타난다.

"부탄 마지막 일정을 이런 곳에서 보내야 하다니!"

소남 초르펠 (Sonam Chorpel)이 제한해 준 일정을 내 멋대로 변경했더니 이런 결과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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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utan Journeys의 대표 소남 초르펠 (왼쪽) 운전수 파상과 따시 (오른쪽)

팀푸는 부탄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피날레였으므로, 부탄 시내 대신 동쪽으로 향하는 길에서 소남 초르펠씨가 날 맞이해준다. 소남 초르펠은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가이드 출신의 여행사 대표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Bhutan Journeys를 세웠다. 여행사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인정이 많은 데다 나같이 혼자 온 여행자도 세심하게 배려해 주기 때문에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고. 메일로 의견을 서로 주고받다가 실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니 너무도 기뻤다. 파상은 차 안에서 소남 초르펠 씨에 대해 수없이 나쁜 말을 하며 흉을 봤지만, 실제로 만난 두 사람은 너무도 친밀하고 스스럼없는 관계였다. 대표의 자리에 있으면서 아랫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그를 보면서 이 여행사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출라(Dochu La)를 넘어 멧시나(Metshina)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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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출라 고개 (Dochu La)

팀푸에서 작은 마을 멧시나로 향하는 드라이브는 파로에서 팀푸로 가는 길보다 훨씬 지루하다. 강을 따라가는 길이 아니라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기 때문에 보이는 풍경도 특별한 것이 없는 데다, 위험한 산길을 타고 가니 밖을 쳐다보기가 무섭다. 홍초 (Hongtsho, 2890m)에서 또 하나의 검문소를 지나자 해발 3,140m에 위치한 도출라 (Dochu La) 고개가 나온다. 맑은 날씨에는 부탄의 히말라야 산맥이 한눈에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때마침 기어 나온 구름 때문에 한 치앞도 보기 힘들다. 히말라야 산맥을 보지 못 했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2005년 인도 북부 지방의 아삼 (Asam) 반군이 부탄을 침략했을 때 이들을 물리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108개의 초르텐이 또 하나의 멋진 풍경을 선사했으니까. 구름으로 뒤덮인 수많은 초르텐은 마치 부탄 군인들의 혼령이 이 곳에 깃들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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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상은 옥수수와 무를 사주면서 오늘 점심이라고 끝까지 뻥을 쳤다

따시와 파상은 늦게까지 자고 일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허기가 지지 않았지만, 아침에 먼 길까지 걸어갔던 나는 금세 배가 고파졌다. 파상은 도로변에 잠깐 차를 세우고 나에게 옥수수를 사준다. 잘 구워진 옥수수는 특별한 양념 없이도 허기진 배를 채웠기 때문인지 너무도 맛있었다. 심지어 부탄 사람들이 간식으로 먹는 '고춧가루로 버무린 생(生) 무'조차 목구멍으로 잘 넘어간다. 파상은 너무도 맛있게 옥수수와 무를 즐기는 내 모습을 보고 이걸로 점심은 끝이라며 멧시나까지 멈추지 않고 운전할 거라고 말한다. 처음엔 그의 장난에 맞춰주다가 끝까지 거짓말하는 파상의 모습을 보며 나도 소남 초르펠에게 장난으로 전화를 거는 척한다. 따시와 파상이 점심값을 빼돌리려고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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