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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Dec 11. 2024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

홍승희가 돌아왔다. 무당으로

작가는 90년 생 MZ 무당 홍칼리란다. 책 제목은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 책장을 넘기기 전에 무당 키워드로 나에게서 뻗어나간 여러 가지에 달린 맵핑 데이터가 머리에 떠오른다. 어릴 때 봤던 굿판에서 무당이 흔들던 방울 소리, 내 쪽으로 던진 무녀칼에 흠짓한 경험 등과 선생을 하면서 비인간 동물의 치유효과를 확인하고 관심을 가지며 만난 샤머니즘의 수행자 무당을 떠올리며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를 읽다가 홍칼리는 내가 아는 홍승희라는 걸 알았다. 홍승희(동생) 홍승은(언니) 자매는 춘천에서 <인문학 카페 36.5>를 운영하면서 입간판 형식의 아포리즘으로 널리 알려졌다. 아마 2013년이었다. 자매는 세월호 추모 공간에서 <대한민국효녀연합>의 깃발로 다시 유명세를 탔다. 언니 홍승은은 폴리아모리를 선언하고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책도 냈다. 이후로 꾸준히 글쓰기와 페미니즘 에세이를 내면서 성공한 작가로 성장한다. 동생 홍승희는 정체성과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들어하다가 인도로 갔다는 얘기만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홍승희가 작가이자 무당인 홍칼리로 짠하고 등장했다.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는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럽다. 인터뷰이 무당들 몇 분은 온라인에서 이미 알고 있던 분이지만 무당인 줄 몰랐다. 나와 세대를 달리하는 분들이라 공감을 위해 매개와 필터가 필요했다. 내가 살아온 관성으로 즉각적으로 무당과 퀴어와 트랜스젠더, 성노동, 폴리아모리 등에 저항감이 있기 때문이다.

책 독자는 읽는 행위에서 자신을 돌보는 과정을 이어간다. 독서는 주관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모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은하의 수천억 별들도 보이는 건 유명한 별자리 몇 개인 것처럼 내가 관장하는 기억과 지식 범위에서 활자 콘텐츠를 소화한다.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 제목에서 내가 무당을 만나러 가려고 했던 경험이 소환된다. 말(馬) 테라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호스보이>를 만났다. 아버지 루퍼트 아이젝슨이 자폐 아들의 치유를 위해 심리학자 아내와 함께 몽골 샤먼을 찾아간 여정과 몽골에 다녀와서 승마를 통해 자폐의 울타리를 넘어 성장하는 아들 로완의 이야기를 담았다. <호스보이>는 다큐 영화로 만들어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부산국제영화제에도 다녀갔다.

나는 믿는다. 몽골 샤먼을 만나고 축복을 받았기에 로완의 자폐 증상이 흐려지고 타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걸 말이다. 몽골이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서 샤먼들이 변경의 툰드라 지대로 숨었다는 것을 <호스보이>에서 알았다. 몽골 샤먼을 만나기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내가 관심을 가진 샤먼은 홋카이도의 아이누 원주민 무당이었다. 6년 전에 홋카이도를 방문해서 수소문했지만 짧은 방문일정에 아이누 무당을 만나지 못했다.

처음부터 국내 무당을 만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아는 한국의 무당은 내가 생각하는 무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에도 부정적으로 ‘맥아더 장군을 모시는 무당’을 언급한다. 압도적인 무력과 일방적 폭력, 엄청난 재력을 지향하는 한국의 무당은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유럽 백인 남성의 색채가 없거나 매우 약한 지역의 전통 무당은 신과 통하고 영혼과 대화하는 영험한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호스보이>의 아이젝슨도 뉴욕의 세계무당대회에서 아프리카 무당으로부터 몽골 무당을 추천받았다. 

물론 내가 차지하고 있는 우주 공간은 매우 협소하여 무당의 영험에 대해 심리적 저항이 거세다. 자폐를 치유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자폐를 병으로 규정하게 된다. 내가 늘 경계하는 개념화 작동이다. 더구나 무당을 해리포터와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살았기 때문에 무당의 영험함도 필터링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결국 정리한 것은 무당을 만나기로 결심하고, 마음을 모으고, 실제로 만나러 가는 고난의 여정을 부모와 자폐 어린이가 함께 한 ‘시간’이 변화의 동력이라는 결론이다. 로완과 부모는 툰드라 지역의 몽골 샤먼을 만나기 위해 자동차를 이용할 수 없는 지역에서 여러 날을 말을 타고 이동했다. 추운 날씨에 진흙길을 말을 타고 이동하고, 밥을 먹고, 텐트 야영을 하는 고난의 길이 물리적 시간으로 축적되고 표현된다. 액팅으로 채운 <시간>이 우리의 치유자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다. 무무 무당이 이런 말을 한다,

“함께 우는 사람이요. 어떤 사회건 역사의 매 순간에 무당 혹은 무당 같은 존재가 있었어요.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는 사람,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무당을 찾아가 도저히 다른 데서 풀 수 없는 한을 풀었고요. 무당의 존재 이유는, 그들이 한을 푸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앗! 여기서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눈에 확 들어왔다. 한을 푸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한을 푸는 통로를 <무당>으로 규정한다면 무당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교직을 무당과 같이 생각하지 않았나 비로소 깨닫는다. 또한 홍칼리와 홍칼리가 만난 인터뷰이 무당들도 비로소 한을 푸는 통로로서 인정된다. 

영험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우는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닐까? 함께 우니 최소한 둘 이상의 복수의 사람이 있어야 영험은 발휘된다. 고립되면 영험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립된 자에게 다가가는 무당이 영험한 무당이라면, 내가 다가가야 할 고립된 존재가 확실해진다. 더구나 그(들)이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면 굿과 같은 퍼포먼스를 고민해야 한다.

홍칼리는 “인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고 말한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언어 위주의 문명에서는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 자본주의 고도화는 언어와 문자의 고도화를 불렀다. 언어는 삶의 일부를 드러낼 뿐인데, 지금 사람들은 언어의 외피를 쓰고 산다. 언어의 외피 밖의 우주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 나는 언어 없이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한다면 따뜻하게 안아주는 게 99%가 아닐까. 나는 “안아주는 무당”으로 불리고 싶다. 비언어의 우주에서 돌보는 존재가 21세기 무당이 아닐까.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 덕분에 내 안의 무당의 씨앗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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