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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여름 Sep 16. 2020

오지말라 말해야 하는 부모님의 마음

그러고도 또 대문밖을 내다보는 부모님의 마음


 최근 뉴스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 한 장면이 있다. 추석명절, 코로나 때문에 자식들에게 오지 말라고 당부한 어르신이 오지말라고 해놓고도 차소리가나면 우리딸이 오나, 아들 오나 대문을 쳐다본다는 것이다. 뉴스는 노인인구가 많은 의성군에서 휴대폰 사용이 어려운 어르신들을 위해 안부영상 제작을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생활지원사들은 부지런히 어르신들을 찍었고, 영상속 어르신들은 이번 추석은 내려오지 말라고 말하며 어색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평소에는 쑥쓰러워서 하지 못할 말들이었을 것이다.


 4남매의 막내인 나는 그런 부모님들의 마음을 꽤 잘 아는 편이다. 언니오빠들이 서울과 다른 도시로 가고 난 후, 방학이나 주말에 언니오빠가 오면 아주 많이 좋아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가고 나면 많이 아쉬워하셨다. 막내가 집에 있음에도 다른 자식들이 항상 보고 싶으셨는지 그렇게 많이 아쉬워하고, 또 좋아하셨다. 그러나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아는 나도 막상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니 자주 집을 찾지 못했다. 주말에 들르면 안되냐는 아버지의 전화를 피곤하게 끊은적도 있다. 나는 부모가 되어 본적이 없어서 아무래도 그 마음을 다 알기엔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생활지원사가 어르신의 안부영상을 찍고 있다. 코로나19는 여러모로 속상한 상황을 만든다. (사진출처:의성군 블로그)



 그래서 어느정도의 의무와 부담을 가져야 하는 명절은 어쩌면 시골의 어르신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명절 대이동을 가리켜 "평소에 찾아뵙지 못하는 죄책감을 해소하는 탈출구"라  표현했지만 그래도 그날만큼은 자식들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날이니 어르신들은 그저 기쁘다. 그러니 어르신들에게 일년에 겨우 두번뿐인 명절마저 포기하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직도 하루 확진자수는 세자리수를 유지하고 있고, 코로나19에 가장 취약한 어르신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동을 자제하는 것 뿐이다.  노인인구가 타지자체에 비해 꽤 많은 의성군이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도 결국은 어르신들이 집단 감염될 경우 그 어떤 계층보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의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군지자체가 이번 추석을 예의주시하며 확산을 막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양새다. 평소라면 고향방문을 환영한다고 곳곳마다 플랜카드를 걸고 박물관이며 관광지며 각종 이벤트와 체험시설을 열었겠지만 코로나19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바꿔버렸다.


 뉴스에 나온 어르신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자식에게 줄 농산물을 다듬으셨다. 자신이 농사지은 것을 자식에게 직접 안겨주는 기쁨은 없더라도, 어찌됐건 자식과 손주 입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손을 놓을 수 없으셨나보다. 뉴스를 보고나서 나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엄마에게 몇가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는 내가 회사에서 잘했던 일을 자랑했다. 엄마는 잘했다 칭찬했고, 아마 전화를 끊은 후 아빠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도란도란 저녁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동네에서 만나는 할머니들에게 그 이야기를 또 할 것이다. 안부영상을 찍는 할머니들처럼 꼬불꼬불한 머리를 한 우리 엄마는 이야기를 재료삼아 또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것이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며 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면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불편하고, 빨리 종식되어야만 하는 전염병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오만하고 오늘만사는 우리에게 브레이크를 걸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것도 분명하다. 인간의 이동을 제한하자 금세 깨끗해진 관광지를 보며, 처음으로 이동의 자유를 제한당하는 스스로를 보며, 마스크없이 살 수 없는 모두를 보며,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익숙해서 함부로했던 자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번 추석을 통해 부모님이 영원히 우리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날이 올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그렇다. 부모님은 차소리가 나면 자식이 오지 않을까 내다보시지만, 그렇게 살아가시는 내내 우리를 기다리시지만 어쩌면 더 큰 그리움을 감당해야 하는 쪽은 자식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우리곁을 떠나시면 그때부턴 차소리에 내다보는 그런 기대조차 가져볼 수 없을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괜히 눈물이 난다. '코로나가 끝나면 주말마다 엄마보러 가야지', 하고 다짐한다. 아니, 그전에 전화라도 자주해야겠다 다짐한다. 부모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언젠가 너무 오랫동안 그리워해야할 미래의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 덧붙여

 언젠가 인터넷 게시글에서 '부모님이 살아계실때 동영상을 많이 찍어두라'는 글을 본적이 있다. 돌아가시고나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서 동영상이라도 찍어둘걸, 하고 많이 후회한단다. 코로나가 끝나면 자주 찾아뵙고, 영상도 많이 찍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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