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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여름 May 12. 2024

재능 없어도 일단 한다, 텃밭농사



가장 호화스러운 방법으로 쉬어보려 했던 호캉스는 냉정하게 말해 실패였다. 머리를 비우기는커녕 무거운 짐이 나를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으니, 앞으로 호캉스는 여럿이 함께 가야겠다고 나만의 매뉴얼에 새겨 넣었다. 바스락거리는 하얀 이불과 푹신한 침대, 맛있는 음식들이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에는 '삐빅'- 경고음이 울리는 선택이다. 



그렇게 두번째로 맞은 휴식은 ‘텃밭농사’.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지금이 딱 모종을 심어야 할 시기다. 볕도 안 들어오는 오피스텔에 살지만 다행히 친구네 집 마당과 근처 텃밭을 이용하기로 했다. 텃밭농사가 내게 어떤 의미이냐 하면, 스무살 이후로 늘 해보고 싶었던 ‘나 혼자서만 오롯이 책임지는 농사’이자 언제든 할 준비가 된 당연한 ‘버킷리스트’ 였다.(써두고 보니 호캉스도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였던 걸 보면 ‘휴식’이라기보다 ‘버킷리스트 해 나가기’가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작년 이맘때 제주민속오일장에 갔다가 시들시들한 모종에 잔뜩 실망했던 나는 인터넷으로 수소문해 외도에 있는 모종 파는 곳을 알게 된다. 정식으로 등록된 가게는 아니었고, 이불가게 앞에 좌판을 깔고 젊은 여자 둘이서 씩씩하게 모종을 팔고 있었다. 이전의 나쁜 기억은 잊으라는 듯, 내가 심고 싶어했던 모종들은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옹기종기 줄을 서 있었다. 와중에 눈길을 끈 것은 플라스틱 병을 활용해 나름 수경 재배 중인 딸기였는데, 안그래도 딸기 모종을 찾던 나는 어설프지만 탐스러워 보이는 딸기들에게 혹해 비싼 포트를 5개나 바구니에 담았다. 이 외에도 옥수수, 고추, 상추, 오이, 토마토 같은 작물들을 양껏 담으니 3만 8천원이라는 다소 적지 않은 값이 나왔지만, 내가 처음부터 키우는 품을 생각하면 큰 돈도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모종들을 안아들고는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너는 집안에서 기타 연습을 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친구네 집은 한라산과 도시 사이에 위치한 중산간 지역이었다. 도시와 조금 떨어진 외곽, 저 멀리로 밀키스 같은 빛깔로 바다가 보이는 동네. 그의 집 마루에서 훤히 보이는 팽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가 파도처럼 춤추며 여름의 소리를 냈다. 건장한 남자인 그는 처음에 약간 나를 의심하는 듯 했으나, 씩씩하게 장갑을 끼고 삽을 든 모습을 보고는 악보를 꺼내 천천히 기타연습을 시작했다. 맑은 통기타 소리가 온 집안과 마당으로 퍼져나갔다. 소심한 백구가 옆에서 나를 경계하며 쳐다보다가 이내 안심하고는 편안한 눈빛으로 내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흙을 팔 때마다 꿈틀대는 지렁이들에게 미안했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 눈을 질끈감고 땅을 파헤친다. 마당에는 골을 형성했던 흔적이 남아 이곳에서 몇 년 전까지 텃밭농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지을 사람이 없어진, 돌이 많은 땅. 이곳에 다시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이 어쩐지 뭉클해졌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는 생각보다 괜찮은 실력으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이 정도면 되는 건가?’



모종을 심으면서 자꾸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제서야 나는 텃밭 농사를 하기 위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깊이를 얼마만큼 해야 할지, 간격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모르고 그냥 냅다 심으니 어쩐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 십년간 다른 사람들이 해오는 걸 보며 당연히 나도 할 수 있을거라 쉽게 생각했나보다. 서리태를 심어 보겠다고 엄마에게 전화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한숨 쉬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 내가 농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삽질하다 멈춰서 가만히 고민하던 나를 본 걸까? 기타를 정리한 친구는 내게서 삽을 뺏더니 설컹설컹 거침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지렁이가 불쌍해 얕게 땅을 파던 나와는 다른, 그야말로 ‘남자의 삽질’. 친구의 굵은 팔뚝이 오늘따라 유난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가 파놓은 땅 위로 모종들을 하나둘 심는다. 잘 자랄지 안 자랄지는 알 수 없지만, 뭐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날 우리는 새로 산 예초기를 들고 큰 귤밭의 제초작업도 함께했다. 제초의 즐거움을 알고 있는 내가 우긴 덕분이다. 친구는 역시나 못미더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풀들을 베어나갔다. 잡초는 제 생명력을 과시하듯 굵고 질기게 자랐다. 예초기의 날이 풀들의 목을 자를 때마다 풍겨오는 풀의 시체냄새. 참으로 오랜만이다. 하지만 제초작업은 쉽지 않다. 무거운 예초기를 들고 한 시간 가까이 고군분투한 것 같은데 돌아보니 애들이 장난쳐 놓은 것처럼 가소롭고 볼품없다. 제초제를 친다면 풀들이 다 죽어버리겠지만, 그마저도 시설이 없어 여의치 않은 상황.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예초기를 짊어지고 터덜터덜 철수했다. 


힘든 줄도 모르고 농사일을 했더니 어느새 4시간이 훌쩍 넘었다. 녹초가 된 우리는 고단한 몸을 이끌고 고깃집으로 갔다. 주민들만 올 것 같은 허름한 노포의 느낌이 물씬나는 고깃집. 양념 고기가 1kg에 3만원 초반인, 그야말로 도민 맛집이었다. 중간에 연탄을 하나 올려주고 그 위로 부속고기와 껍데기 등을 굽는다. 밖은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옆 테이블에 앉은 주변 사람들은 자신만의 인생의 짐을, 마음 깊이 있던 진심을 털어놓는다. "내가 무너지면 나만 바라보는 우리 가족들이 힘들어지니까."라는 약간의 술기운 섞인 말이 귀에 꽂힌다. 깔끔한 사무실에만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이 터져나오는 모습. 나 또한 각자의 사연을 털어놓는 사람들 옆에 앉아 고단한 피로를 푼다.  묵묵히 고기를 굽는 친구는 고기가 구워질 때마다 내 접시에 올려놓는다. 추가로 주문한 도시락을 친구 앞에 놓으며 나 역시 묵묵히 고기를 먹는다. 그저 농사일 잠깐 했을 뿐인데, 문득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생각이 드는건 아마 부모님이 떠올랐기 때문이겠지. 우리 부모님은 이 어려운 일에 일상을 온통 쏟아부으며 살아오셨다. 그에 비하면 내가 걸어온 날들은 어찌어찌 운좋게 버틴 장난처럼 보인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만큼 고기를 먹고도 영수증에는 3만 5천원이 찍힌다. 고깃집을 나서는 길에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해가 졌지만 완전히 어둡지는 않은 길을 비를 맞으며 걷는다. 차까지 채 10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 평소라면 질색했을 비를 온몸으로 맞는다. 내 머릿속을 괴롭히던 잡다한 생각들이 다 쓸모없는 헛소리같다. ‘이래서 머리가 복잡할 땐 몸쓰는 일을 하라는 거구나.’ 어디선가 자주 들었던 말에 신뢰의 도장을 쾅쾅 찍는다. 쓸데없는 생각말고 그냥 내가 할 일을 가만히 해 나가야겠다고, 머리가 아닌 몸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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