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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여름 May 22. 2024

직접 먹거리를 채취하는 기쁨


대도시 생활을 시작한 스무살 이후, 내 입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먹거리는 어느땅에서 자란지 모르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나의 노동은 항상 돈으로, 그리고 돈은 다시 시장의 유통 시스템 속 상품과 교환되어 내게로 돌아왔는데, 시골에서 자고 나란 나는 이 시스템이 종종 낯설게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어쩌다 가끔 길가에서 산딸기를 따 먹거나 냉이와 달래같은 봄나물을 캐면 그 생동감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내가 시골에서 자란탓인지, 아니면 유전자에 새겨진 수만년의 본능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돈이라는 족쇠가 아니어도 먹고 살수 있다는 해방감일 수도 있다.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것도 실은 그 물기 가득한 생동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예초기나 모종값을 생각하면  차라리 사 먹는게 싸게 먹혔지만, 갓 따낸 채소가 품은 생기 가득한 에너지를 고스란히 몸안으로 받을 기쁨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는 값이었다. 그 기쁨을 잊지 못해 초라하지만 소중한 나의 텃밭을 가꾸려고 또다시 친구네 집을 찾았다. 


일주일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방치(?)했음에도, 고맙게도 모종들은 잘 자라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에게 물을 듬뿍주고 주변의 풀들을 정리했다. 한시간도 되지 않아 밀집 모자 안으로 머리가 땀에 흥건히 젖는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아닌데도 볕이 순하지 않았다. 감나무와 동백나무를 타고 올라간 넝쿨도 싹둑 자르고는 온 힘을 다해 끌어내린다. 마당 한 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백구가 왔다갔다 하며 나를 바라본다. 고운 먼지가 훅, 하고 일어난다. 잠깐 쉴 겸해서 미리 준비해 간 간식을 한 팩 뜯어 아직 친하지 않은 개에게 건넨다. 경계심이 없는 건지, 집주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여러번 봐서인지 백구는 잔뜩 흥분한채로 내가 던진 간식을 게눈 감추듯 먹는다. 아침부터 시작한 작업이 점점 길어지고, 해는 갈수록 더 뜨거워진다. 


한라산 중산간에 위치한 친구네 집은 이런저런 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다. 석류나무, 모과나무, 산수유, 대추나무, 감나무 등 열매가 실하게 달리는 나무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알알이 열매를 맺는 매실나무가 처음부터 나의 시선을 끌었다. 아직 다 큰 것 같지는 않은데 자꾸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게 보인다. 혼자 애가타 친구에게 물었지만 그냥 떨어지는 대로 두고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나무라고 했다. '그러면 안돼지. 아깝잖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올때 즈음, 친구네 집에 처음 왔다가 뒤뜰을 가득 메운 달래밭을 보고 아까워했던 그 마음이 떠올라 얼른 친구에게 내가 따가겠다 말한다. 비닐랩 두 개를 얻어 개 중 큰 것들로만 골라 수확한다. 갓 딴 매실은 위풍당당하게 제 존재를 뽐내며 잘 여문 자신의 단단한 과육을 과시한다. 그렇게 매실 두 봉지를 품에 안은 나는, 이것이 내 인생의 첫 '매실청'이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집으로 돌아온다. 



마트를 들러 설탕과 올리고당, 적당히 큰 유리병을 사고는 함께 들고 온다. 하루종일 마당 정리를 하느라 옷에는 흙과 마른 풀이 붙어 있었지만, 조금 갑갑하게 느껴지던 작은 집에 산과 들을 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나 오히려 좋았다. 인터넷을 검색해 꼼꼼하게 매실청 레시피를 살피고는 언니와 엄마에게도 전화를 해 한번 더 확실하게 QnA를 마친다. 유리병에 대충 뜨거운 물을 부어 소독해주고, 매실은 가볍게 3~4번 씻어 이쑤시개로 꼭지를 제거한다. 상처난 부위를 말끔히 도려내고는 올리고당 1.2kg, 설탕 1.5kg, 그리고 매실 2.8kg을 담는다. 남은 매실은 적당한 통을 구해 비슷한 비율로 따로 담가준다. 흔하게 널려있지만 '진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어른들이 담가주는 것만 먹었지 내 손으로는 담가본 적 없는 첫 매실청.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한 이십대처럼 가슴이 뛴다. 소꿉장난을 하는 기분도 든다. 이렇게 명랑한 기쁨이 얼마만인가. 적어도 제주에 내려온 2년 4개월의 시간 안에서는 처음인 것 같다. 



올리고당에 절여진 아래쪽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퇴사를 하고 줄곧  '슈드비 증후군(Should be Complex)'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생산적일 걸 해야 한다는 압박감. 언제나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문제적 증후군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그렇다고 딱히 생산적인 일을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공연히 스트레스만 받는 그런 상황이 지속될 뿐이었다. 떼어내려 해도 계단에 붙은 오래된 껌처럼 잘 떨어지지도 않는 습관적인 마음이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종을 심고, 풀을 뽑고, 땅을 고르는 농사일을 할 때면 그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몸을 써서 그렇다'라고 말하기엔 1시간씩 운동장을 걷는것보다도 훨씬 효과가 좋았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땅과, 나무와, 작물과 함께할때면 복잡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은 쓸모없는 관념들이 간밤의 꿈처럼 저절로 사라졌다. 뻣뻣했던 마음의 힘을 빠지고, 머릿속은 텅 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어도 이유를 몰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내가 말할 수 있는건 '어쨌든 효과가 매우 확실하다'는 것이다. 


마음의 힘이 빠지니 분노, 화, 피해의식같은 답답한 감정들도 일단은 보이지 않는다. 수박겉핥기처럼 머리로만 이해했던 지혜로운 명언이 빈틈을 파고들어 자리를 잡는다. 감정은 언젠가 다시 해일처럼 날뛰겠지만, 이것도 자꾸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덤덤한 지혜가 내 안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겠지. 동동거리는 마음이 사라진 지금, 나는 새벽을 맞은 농부처럼 넉넉한 기분으로 힘을 채워가고 있다. 


매실청은 7~8개월 후에 과육과 씨를 빼내고 더 숙성시켜 1년 후부터 먹으면 된다고 한다. 이제 나의 수고는 앞으로 고작 한번 일테고, 그 이외의 것은 시간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는 꼭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도 있고, 때에 맞춰야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혼자 조급해 한다고 매실청이 빨리 완성되지 않듯, 다른 일들도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머리로만 알던 나는 급한 성격을 버리지 못해 지금까지 꽤 손해를 봤다. 기존의 방법이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이제는 다른 방법도 시도할 때가 아닐까 싶다. 잘 안되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선택을 하든 저런 선택을 하든 결국 시간은 똑같이 흘러갈테고, 나중에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그리 큰 차이도 아닐테니까. 어쨌든 다, 결국은 괜찮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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