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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루스트 Feb 17. 2021

내가 사랑하는 초록의 장소들

TASTE | 프루스트의 입맛 저장소
Issue No. 1  Green



초록에 둘러싸여 있으면 특별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심신의 안정을 준다. 하지만 초록의 공간이라고 해서 가는 곳마다 좋을 수만은 없다. 사람도 나와 맞는 사람이 있듯, 장소도 나와 맞는 장소가 따로 있다. 돌이켜 봤을 때 참 좋았던 장소를 다시 한번 찾아가 보고, 이따금씩 지인에게 추천받거나 검색해본 새로운 장소를 시도해보면서 나와 맞는 장소를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면 유독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이 담보되는 장소들을 장전해두자. 삶의 든든한 무기가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가장 보통의 공간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공간까지 행복했던 초록의 공간에서 오감으로 느낀 이야기를 담았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공간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삼겹살의 아는 맛도 먹을 때마다 놀라운 것처럼 함께 곱씹어 즐기는 마음으로 봐주길 바란다.


나의 글이 잠시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움직이자. 자연이 있는 그 어떤 곳이라도.



평창 밀브릿지


평창 오대산 중턱에 자리한 이 숲은 한국 전쟁으로 황폐해진 공간을 한 개인이 수십 년간 매 해 10만 주의 나무를 심어오며 가꾼 보물 같은 곳이다.


“여기선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체험이 됩니다. 두 눈이 자연을 향하면 몸과 마음은 자연스레 공의 상태가 되고, 비움은 또 다른 채움을 주죠.”


정말 그랬다.


신랑과 나는 숙소 안 통유리를 액자 삼아 멍하니 숲을 바라보았고, 문을 열면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간간이 위치한 나무 베드에 누워 위로도 빽빽한 나뭇잎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좋은 공기로 몸을 가득 채우고픈 마음에 숨을 천천히 깊게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나는 산림욕이 목욕과 같은 ‘목욕할 욕’을 쓰는 이유를 이곳에서 온 몸으로 느꼈다. 정말 몸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목욕만큼의 개운함을 느꼈다.


한 발 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전나무 향이 콧속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돌아 나왔다. 담을 수만 있다면 이 전나무 향을 공병에 담아오고 싶었다. 향을 수집할 수 없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신 우리는 숲의 소리를 담아왔다.


숲에는 도심에서는 들을 수 없는 다양한 새소리가 있다. 숲 속 새들의 청아한 떼창은 늘 불협화음 없이 완벽한 화음을 들려준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여름의 소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

촤아아아아 바위에 부딪히는 계곡의 소리는 얼룩지거나 뭉실뭉실한 마음을 씻겨주는 것 같다.


2020년 6월 14일 녹음된 음성 메모를 듣는다.

평창의 전나무 숲에 단숨에 다다랐다.

























강천섬


강천섬 주차장에 도착해 강천교를 지나 1킬로 남짓 걸으면 뻥 뚫린 초록 운동장이 펼쳐진다. 처음 강천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시 초등학생이 된 것 같았다. 그 시절 작은 키로 보았던 학교의 드넓은 운동장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강천섬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빽빽이 늘어선 아파트 단지와 빌딩 사이를 지나 회색 아스팔트 고속도로 위를 달려왔다. 그러다 시야를 가리는 그 무엇도 없는 초록의 평지를 원 없이 마주했을 때 나는 곧장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잔디의 끝자락이 하늘과 닿을 것처럼 펼쳐진 대지의 해방감과 눈을 감고 걸어도 걸려 넘어질 위험이 없는 안정감 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유독 해맑고 자유로웠다.


그늘막을 펴고, 낮잠을 한 숨 잔다. 일어나 배가 고프면 주섬주섬 챙겨 온 감자와 옥수수를 꺼낸다. 버너를 세팅하고 냄비에 물과 소금을 한 꼬집 넣어 삶는다. 집에서 늘 먹던 반찬도 도시락 반찬으로 싸오면 맛있다. 거기에 약간의 허기가 함께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빠는 책을 읽고 나는 뛰어노는 아이들과 이따금씩 날아다니는 새, 흔들리는 나무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가 책을 읽다가 와 닿는 내용을 넌지시 읊조리면, 나는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자 ENTP형으로 잡다한 지식을 동원해 대화에 살을 붙인다. 부부간 대화의 기술이 업그레이드된다. 그동안 제일 많이 발달한 기술은 듣기 기술이다. 내가 잘 들어야 결과적으로 대화가 길어지고 의미 있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귀로는 듣지만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곤 했던 안 좋은 습관이 조금씩 사라졌다. 들어주는 ‘시늉’은 상대방이 귀신 같이 안다. 사실 부부가 평일에 대화를 오래 하기란 쉽지 않다. 회사에서 에너지를 탕진하고 지친 몸으로 도착한 집에서는 진지한 얘기보다는 서로 몸을 맞대고 멍하니 티비를 보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일주일 간 오빠와의 일정 대화량이 충족되지 않으면 무언가 서로가 서로에게 소홀했다는 기분이 든다. 정화능력이 강한 오빠는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본인의 방식대로 상대를 이해하는 강점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 이해하기보다 오해하는 쪽을 선택했다. 물론 서운한 표정 역시 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진짜 말하고 싶은 알맹이는 꽁꽁 감춘 채 에둘러 표현해 오해를 해결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싸움의 스킬도 업그레이드되는 법. 잘 싸우는 스킬을 서로가 획득해나갔다. 있는 그대로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면 돌고 돌아가던 곡선이 직선의 지름길을 발견하게 된다.


출발을 기점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돌아보면 우리 부부는 여행을 가는 차 안에서 가장 많은 대화가 이루어졌다. 손과 발이 묶여있는 운전자는 늘 입이 심심하다. 보조석에 앉은 사람은 그런 운전자의 입에 이따금씩 간식거리를 넣어주며, 말동무가 되어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동차 안은 최고의 대화 환경이다.


강천섬을 시작으로 좋은 기억을 저장하면, 저장된 기억은 우리를 또 다른 시도로 이끌어줄 것이다. 강천섬이 아니어도 좋다. 초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떠나보자.



한강


서울의 한강에서는 초록의 잔디, 잔잔히 흐르는 강, 높은 빌딩 세 가지의 풍경 삼합을 먹을 수 있다. 평화로움과 넘치는 생동감이 공존하는 이곳은 사람이 없으면 없는 대로의 평화로움을 보여주고, 있으면 있는 대로의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지루할 틈 없이 흘러가는 한강에서는 공간을 향유하는 다양한 방식을 볼 수 있다.


좌(혹은 우) 한강 우(혹은 좌) 잔디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라이더와 러너, 잔디 위에서 삼삼오오 둘러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 캠핑 의자에 앉아 나란히 전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연을 날리는 아빠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주인, 자동 조리된 기계식 즉석 라면을 군침을 다시며 조심스레 들고 오는 사람, 몸에 GPS를 장착했나 의심이 들 정도로 주문객의 자리를 귀신 같이 찾아오는 치킨 배달부, 저 멀리 유유자적 요트를 타고 한강 위를 떠다니는 사람, 그늘막 안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등 한강은 이토록 공간을 이용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향유 방식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드라마 같다.


내가 한강을 이용하는 방식은 이렇게 변해왔다.


한 때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낮술 혹은 밤술을 먹던 장소였다. 또 다른 한 때는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던 공간이었고, 작심삼일의 하루를 차지했던 러닝의 공간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서는 주로 신랑과 단둘이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동적으로 이용해왔던 한강이라는 공간을 정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도 햇볕과 선선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껴가며 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다. 나는 잔디 위에 앉아 프랑스 자수를 놓았고, 오빠는 책을 읽었다. 우리는 각자의 취미활동을 하면서 이따금 각자의 시야에 들어오는 장면이나, 스치는 생각을 사이사이 나누면서 합체와 분리를 반복했다. 그렇게 나는 ‘따로 또 같이’의 밸런스가 잘 맞는 날 최대의 행복을 느꼈다.

바깥공기와 함께 먹는 떡볶이와 치킨 맛은 또 어떤가. 그냥 다른 메뉴로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한강은 주중의 일탈에 매우 적합하다. 교외로 훌쩍 떠나기 부담스러운 주중에 한강은 생각을 정리할 고요함을 빌려준다. 2호선을 타고 잠실나루역과 강변역 사이 한강을 지나가면 이따금씩 기관사 아저씨가 라디오 DJ 같은 목소리와 멘트로 한강을 한 번 둘러보라며 오늘 하루를 응원해준다.


“잠시 보고 있는 휴대폰을 멈추고, 창밖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모처럼 미세먼지 없는 화창한 날씨입니다. 남은 하루도 화창한 일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날씨는 풀렸지만, 일교차가 아직 심해요. 황사나 미세먼지에 대비해 마스크도 챙기시고요. 2호선 모든 승무원이 직장인, 학생 여러분 항상 응원합니다. 파이팅하세요!”


“창밖 노을 진 한강을 둘러보세요. 코로나 스트레스는 잊고,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올림픽 공원


올림픽 공원, 정확히 말하면 ‘나 홀로 나무’가 있는 공간에 처음 갔을 때 나는 ‘텔레토비 동산’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실제로 토끼 두 마리가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올림픽 파크텔 호숫가에 가면 이따금씩 파이프 위에서 일광욕하고 있는 거북이 두 마리도 볼 수 있었고, 발길 따라 거닐다 보면 가끔 인도로 마실 나온 오리 가족도 볼 수 있었다.


높낮이가 다른 언덕과 평지의 입체적 조합 덕분에 장소마다 다른 특색을 가진 올림픽 공원은 공원계의 놀이동산 같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있으면 저 멀리 언덕 위를 열심히 경보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외에도, 호돌이 열차와 4륜 자전거를 해맑게 타고 가는 가족들, 한겨울에도 반팔 입고 농구하는 열혈 청년들,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우고 있는 긴장과 앞선 마음이 가득한 어린이들, ‘나 홀로 나무’와의 단독샷을 위해 요리조리 이동해보는 귀여운 커플, 언덕 위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셀프 웨딩 스냅을 촬영하고 있는 신혼부부, 아이들을 풀어놓고 삼삼오오 수다 떠는 어른들을 볼 수 있다.


올림픽 공원은 공간의 다양한 면모 덕분에 매일 가도 매일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 장소 만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는 평범한 하루도 어떤 이와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날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매일 가는 집 앞 산책로도 다른 마음으로 가보자. 공간이 나에게 무한히 줄 것만을 기대하기보다는 나도 그 공간에게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집 앞의 평범한 산책로도 근사한 곳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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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스러움은 때로 강렬한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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