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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도르 Mar 11. 2021

항상 급행열차를 탈 필요는 없다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으므로


출근시간 9호선 강남행 지하철을 약 한 달간 타본 적이 있다. 강남으로 가는 모든 길에는 인간미라곤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중 최악은 강남행 9호선 급행열차이다. 처음 급행을 타던 날 여의도 역에서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9호선 급행열차의 악명을 미처 듣지 못한 채 여의도역 9호선 지하철 승강장에 도착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급행열차가 도착하자 내리는 사람의 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빈 공간을 비집고 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 들어갑니다! 좀 푸시할게요!”라고 소리치며 문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여기저기서의 신음소리는 물론이고 어디선가는 싸우고 있고 누군가는 제발 타지 말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풍경이 매일 반복될 것이라 생각하니 지각이고 뭐고 지켜보던 내발 걸음은 땅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떡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고 귀신을 본 것처럼 등에는 식은땀이 쭉 흘렀다. 돌아가고 일찍 가고 늦게 가고 별 짓을 다해봤지만 출근시간의 9호선 급행열차는 언제나 일관적인 지옥행 급행열차였다.


자기 몸도 다른 몸도 지하철 안으로 욱여넣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조금씩 익숙해지긴 커녕 번번이 속이 뒤틀렸다. 이른 아침 빈속이라 그런가 싶어 꾸역꾸역 아침밥도 규칙적으로 먹어봤지만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진 못했다. 저렇게까지 자신과 타인의 인성을 날카롭게 조각내 서로의 몸으로 비수를 꽂아야만 "먹고사는 일"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존재가 되기를 완곡히 거부하며 마음속에 시퍼런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갈고닦는 사람들 같았다. 인성을 조각낼 용기도 없거니와 애초에 마음속에 칼갈이를 하며 살만큼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없는 나는 늘 도망쳤고, 두 발 물러났고, 기다렸고, 먼저 보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향하는, 그 죽음이 언제 내게 올지 한 치 앞도 모르는 허망한 존재인데 뭘 그렇게까지 타인에게 상처를 투척하고 비수를 꽂으며 살아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티다가 앞으로 다시는 9호선 급행을 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선 프리랜서 일을 강제 종료시켰다. 아침마다 내 몸이 구겨진 채로 사방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입냄새를 맡으며 9호선을 타야 한다면 월급 1억을 준다 한들, 세기의 영웅이 되는 일을 제안한다 한들 마다할 판이었다. ‘내가 다시 강남땅에 출근을 하면 ’ 다신 회사원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한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 번도 출근시간에 강남으로 가 본 적이 없다. 그 이후 출퇴근을 하지 않게 된 나는 지하철을 꼭 한두 대씩 보내는 의식을 치른다. 나의 평화에 대한 예의였다. 몇 대를 침착하게 보내고도 성에 차지 않으면 열대도 애써 놓치며 지하철 역사 의자에 앉아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쓰곤 했다. 죽음의 한기를 느끼지 않는 한 뱃속의 사람이 역겨워 토해낼 것 같은 상태의 지하철에 내 몸을 구겨 넣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나와 남을 구기는 짓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아무리 탈 사람이 많은 시간에도 기다리다 보면 연달아 오는 탓에 소화가 잘되는 공복의 위장을 가진 지하철이 오고야 만다는 걸 알기 때문에 타인을 구기며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남을 구기지 않고 탈 수 있는 지하철은 온다.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으므로.






쓰는 아도르

사진, 글, 캘리그라피 adore
블로그 : http://jwhj0048.blog.me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adore_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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