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와 같은 절차를 거쳐서 과배란과 난자 추출을 마쳤다. 이번에 병원에서는 배양 상태에 따라서 3일 배양을 이식할 수도 있다고 채취 3일째부터 병원 연락이 갈 수 있으니 기다리라는 병원 안내에 따라 기다렸는데 5일 배양이 나왔는지 원래 예정된 이식 날짜에 이식이 진행됐다.
예약 시간에 맞춰서 병원에 가서 수술실 입실 준비를 마치고 내 차례가 되어 수술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모니터에 배아가 하나밖에 떠있지 않았다. 저번 이식 때는 배아가 두 개가 떠 있었는데 왜 하나지? 간호사에게 물어봐도 담당 교수님한테 물어보라며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교수님이 오시고 나서 배양 결과를 알려주셨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12개 채취에 9개가 미세 수정으로 성공했는데 5일 배양으로 넘어온 건 모니터에 떠있는 것 하나. 나머지는 다 4일 배양에서 거의 멈춰서 얼리는 건 의미가 없고 내 나이가 있으니 하나 이식하는 건 아까워서 그냥 4일짜리 중에 골라서 하나 더 이식한다고.
아니 이럴 거면 그냥 3일 배양으로 3개 이식하는 게 나은 게 아닌가? 배양실보다 엄마 뱃속이 더 나을 수도 있다던데 왜 3일 차에 이식하지 않은 걸까. 하나 더 넣는 게 확률상으로 낫지 않나... 그나마 다행인 건 5일 배양짜리 한 개가 상태가 매우 좋다고 했다.
이번 채취 전에 진료실에서 얘기했었다. 1차 때 5일 배양 9개를 얼리다 한 개 남기고 다 날려버린 역사가 있기 때문에 걱정된다고. 3일 배양은 3개를 이식할 수 있으니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식이 끝나고 회복실에 누워서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차병원은 배양기술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1차에서 냉동이 아주 작살이 났다. 그럼 2차에서 다른 방법을 썼어야 되는 게 아닌가? 근데 2차는 더 결과가 안 좋았다. 5일 배양이 1개고 나머진 다 실패라니??
분명 시험관 카페에는 3일 배양 이식하고 얼려서 성공했단 사람들이 엄청 많았는데 왜 여기는 꾸역꾸역 5일 배양으로 끌고 가려 하는 걸까.
이번 2차는 사실 냉동을 모으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차에서 냉동이 한 개밖에 안 나왔으니까. 그런데 냉동이 없을 것 같다니 황당했다. 그럼 내가 신선 3차를 하든 4차를 하든 냉동은 계속 안 나올 거란 얘기나 마찬가지 아닌가. 만에 하나 채취 후 상태가 안 좋아서 신선 이식을 못하면 그 차수는 그냥 망한 거다. 이걸 계속하는 의미가 과연 있을까. 어차피 2차까지만 하기로 했으니 그냥 접는 건 접는 건데 결과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집에 돌아오니 열이 나기 시작했다. 체온을 재보니 37.7도까지 오르고 있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식 후에 열이 나는 경우는 매우 흔한 경우였다. 기침과 재채기가 번갈아서 나오는데 약을 먹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배아는 열에 약하다는데, 그리고 재채기나 기침하다가 배에 힘이 들어가서 배아가 착상 못하면 어쩌지 별별 생각을 다하면서 온수매트를 틀고 끙끙거리면서 누워있을 수 밖에 없었다. 컨디션이 이지경이니 잘 되라고 기대를 할수도 없었다. 배양 후 결과도 개판인데 이식 후 몸 컨디션까지 이러니 진짜 속상했다.
다음날 일어나니 기침과 재채기는 어느 정도 잦아들고 체온도 좀 내린 상태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눕눕을 시전 하던 늦은 오후 가족 단톡 방에 이상한 글이 올라왔다. 막내의 '지금 KTX 다 매진인데?'라는 말.
뭔 소리냐고 했더니 한동안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더니 오전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내가 어제 이식을 했다 하니 아무도 나에게 할머니의 부고를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막내동생만 내 이식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단톡방에 말을 한 것.(원래 누나랑 남동생은 그런 사이다.)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우리 할머니는 포항에서 장수하신 할머니로 상도 받으셨다. 민증 나이가 103세고 실제는 그보다 더 많으실 거다. 90대에도 밭일을 하실 정도로 정정하셨는데 몇 년 전 몸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셔서 요양원에 가셨고, 작년부터는 코로나로 인해 면회도 차단된 상태였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할머니를 뵈러 가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은 이젠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됐다.
나는 어릴 때 시골에 보내져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할머니가 서울에 오셔서 생활 하셨던 기간도 꽤 길었다. 이제 우리 할매를 다시는 못 본다고 생각하니 이식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울면 안 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한참을 울다가 내려가는 기차 편, 항공편을 알아봤는데 금요일 늦은 오후에 표가 있을 리 만무했다. 포항 가는 비행기는 오전에 한 편 있고 KTX는 전석 매진이었다. 엄마와 남편은 네가 지금 어딜 가냐고 집에 있으라고 난리가 났다. 엄마는 괜히 내려왔다가 잘못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거냐고 했다. 남편은 여러 사람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제발 집에 있으라고 했다. 엄마한텐 책임은 내가 진다고 소릴 질렀고 남편한텐 잘못되면 신선 3차를 하겠다고 했고 남편은 경악했다. 우린 이번 차수가 마지막인 것으로 결정해둔 상태였고 남편은 시험관으로 인한 하인&노비 노릇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신선 3차라니 절대로 안된다며 벌벌 떨었다.
신선 이식 2일 차였다. 3일 차 까지는 그래도 누워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1차 때는 거의 열흘을 눕눕 했고 착상에 성공했었다. 이식 후 일상생활은 해도 된다고 하지만 '간단한'이라는 조건이 붙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포항까지는 막히지 않아도 차로 5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였다. 주말엔 기본 7시간은 걸린다.
내가 무조건 내려간다고 난리를 피우니 남편은 그럼 뒷좌석에 누워서라도 갈 거냐고 물었다. 그런데 차마 다섯 시간 이상을 차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임 카페에서도 장거리 차량 이동은 피하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식도 문제지만 채취하고 나서도 몸이 좋지 않아서 계속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질정은 어쩐담. 장례식장에서 질정을 넣고 누워있을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이 와중에 이런 고민을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서글펐다. 남편은 질정 하루 빼면 되지 않냐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다가 나한테 된통 혼나고 프로게스테론의 중요성에 대한 강의를 들어야 했다.
결국 다음날 낮 자리가 있는 기차표를 구했다. 장례식장은 흥해여서 공항보다 기차역이 더 가까웠다.
난 빨리 걸을 수가 없는 상태여서 일찌감치 역으로 출발했다. 몸이 멀쩡할 때는 조그만 조카 녀석들의 걸음이 참 느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난 조카들 걸음마냥 늦게 걷는 상태였다. 이제 여섯 살이 된 큰 조카는 내 손을 잡고 기차를 타러 천천히, 같이 걸어갔다.
가까운 친척들은 내가 시험관을 하는 상태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고 다들 나를 꼼짝도 못 하게 했다. 장례식장 바닥은 뜨거웠고 질정이 녹을까 봐 동생 차에 가방을 옮겨놔야 했다.
뭔 일인지도 모르는 조카들은 엉엉 우는 엄마와 이모를 따라서 할머니 영정 앞에서 절을 따라 했다. 장례식장의 슬픔과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대비는 삶과 죽음의 대비와 같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왜 우냐는 질문에 증조할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알려줬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할머니는 백살이 넘으셨으니 다들 호상이라 했다. 죽음에 좋은 죽음이 어딨겠냐만은 긴 여생 건강히 사시다 증손주까지 보고 가셨으니 어쩌면 편안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박씨 문중이 워낙 커서 원래대로라면 장례식장이 미어터졌겠지만 코로나 여파로 조용했다.
장례식장에선 아는 사람들이 오면 일어나서 인사를 안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눕거나 앉아서 인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계속 앉았다 일어났다 했더니 배가 뻐근하고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결국 구석에 누워있다가 일어났다를 반복하다가 근처에 방을 잡고 이동해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다들 할머니가 평생을 자식들 생각만 하시다가 병치레 한 번을 안 하시더니 가실 때도 자식들 편하라고 주말에, 한겨울 다 지나고 포근해지기 시작할 때 가셨다고 했다. 주말 포항 날씨는 미세먼지는 좀 있었지만 영상 12도였고 맑았다. 장지에 따라가고 싶다는 걸 모두가 뜯어말려서 결국 나랑 동생이랑 조카들은 발인까지만 지키고 서울로 오기로 했다. 그래도 할머니 가시는 마지막 길을 봤으니 후회는 없다. 이것도 못했다면 아마 평생 후회로 남았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혹시 아이를 지켜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다. 만약 안되면 그건 할머니 장례랑도 상관없고 그냥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서울에 돌아와서 거의 누워만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냥 몸이 계속 피곤했다.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장례식에서는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 취급이라 사위들이 거의 아들 위치였다. 남편은 선산을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정장에 구두 차림이었으니 오죽 불편했을까. 결국 남편도 몸살이 나서 둘이 같이 끙끙 앓았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셔서 광복과 6.25를 겪고 한강의 기적과 지금의 코로나 사태까지. 살아있는 역사책이었던 우리 할매는 신세대 할매였다. 내가 결혼했을 때 아이 낳을 생각은 별로 없다고 했더니 애 있어봐야 여자만 힘들다고 '말라(뭐할라고) 얼라(아기) 낳아가 힘들라 하노. 그냥 느그들끼리나 편히 살아라'하셨고 동생이 둘째 아들을 낳았다고 했을 때 '몸 힘들게 왜 얼라를 둘이나 낳냐'며 뭐라 하신 분이었다. 물론 옛날분이니 집안 첫 손녀인 나보다 손자들이 우선이셨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손자들 만큼 손녀들도 그렇게 아끼셨다. 동생 꿈에는 할머니가 나왔다는데 내 꿈에는 안 오시는 것이 좀 서운하지만 좋은 데 가셨으니 안 나오시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피검사는 구정 연휴 중에 예약이 되어있다. 착상에 혹시 성공했다면 아마 임테기는 그전에 반응이 있을 것이다. 한 줄이 뜬다 해도 이번엔 어쩔 수 없다. 예상 밖의 일이었으니. 신선 3차를 할 지에 대해서는 남편과 한 번 더 얘기를 해보겠지만 아마 안 할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다. 할머니는 느그들 끼리 편히 살라 하셨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