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차수는 참 힘들었다. 과배란도 많이 힘들었고 채취하고 몸이 많이 아팠고 이식한 당일 열이 37.7도까지 오르면서 감기 기운이 심했으며 이식하고 이틀차에는 할머니의 부고를 들어서 포항에 내려갔다 왔어야 했다.
포항에 다녀오고 난 뒤 집에서 쉬고 있는데 1차 때 임신이 되었을 때랑 증상이 비슷했다. 7일차에 아주 약한 선홍빛 피가 살짝 비치길래 '오, 이번에도 착상혈이군!' 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번에도 이 즈음에 엄지손가락 만한 착상혈이 보였었다. 이번에는 얼리테스트기를 사둔 터라 7일차에 이미 얼리 테스트기의 희미한 두 줄을 봤다. 8일차에는 원포로도 희미한 두 줄이 보였다. 임신이구나.
8일차는 구정 연휴 시작날이었다. 원포 테스트기가 희미하게 두 줄이 되면 착상에 성공한 것이라는 것을 1차 때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너무 신이났다. 그렇게 즐겁던 아침,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갔는데 울컥, 핏덩어리가 나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분명 어제꺼는 착상혈이었을건데 이 피는 뭐지.
구정 연휴 시작날 아침 7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병원은 열지 않은 상태였고 명절이니 당직 의사들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다니는 병원에는 오전 진료가 있다고 했다.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부랴부랴 차병원으로 달려갔다. 연휴에는 병원에 사람이 너무 많다. 한참을 기다려서 진료를 보고 슈게스트를 2cc나 맞았다. 출혈을 멈추려면 유산방지주사를 맞아야 하니까. 슈게스트는 난임카페에서 악명높은 돌주사였다. 맞고나면 엉덩이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는다고 해서 그런 별명이 생겼다고 했다.
주사를 맞은 엉덩이는 불룩 튀어나왔고 왼쪽으로는 돌아누울 수도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오후 늦게 병원에서는 피검사 수치가 16이라면서 일단 10이 넘으면 임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원래 이식 10일차에 피검사를 해야 하는건데 이틀 빨리 한거니깐 원래대로 토요일에 와서 피검사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주사를 맞으면 멎어야 한다는 피는 멎지 않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 누워있는 수 밖에는 없어서 정말 그냥 침대에서 멍하니 누워만 있었다.
이제 난 어떡하지.
이런 완전 극초기 출혈은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인터넷에는 이렇게 생리처럼 피가 나고도 임신이 유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일말의 기대감이 들었지만 금방 체념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나쁜 쪽이 내 경우던데... 특히나 시험관 시술에 있어서는 정상적인 임신 과정이 아닌 이벤트는 곧 실패였다.
연휴 시작부터 이틀 내내 아무것도 못하고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화장실에 가면 피가 나올까봐 뭘 먹는 것도 무서웠다. 움직이는 것도 배에 힘이 들어갈까봐 겁이났다. 명절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출혈을 막아준다는 연근가루를 쿠팡에서 주문했는데 포장이 터져서 배송되었다. 반품 요청을 하면서 화가나서 눈물이 다 났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미칠 것 같은 이틀을 지나고 원래 피검 예정날이었던 토요일에 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이번 당직 선생님은 슈게스트를 그렇게 고용량으로 맞고 피가 안멈췄으면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 용량이면 1주일치를 한방에 맞은거나 마찬가지라고.
남편이 자꾸 포항에 갔다와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해서 선생님한테 물어봤더니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거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면서.
피검사 결과는 73으로 임신 확정이었다. 임신 수치를 들었는데도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2차 피검이 이틀 뒤로 잡혀있는데 시간이 죽어도 안갈 것만 같았다.
출혈은 여전했다. 오히려 출혈이 늘어서 어질어질 할 정도였다.
일반 생리라고 보기에는 너무 피도 많이 나고 배도 많이 아팠다. 내가 할 수 있는건 누워있는 것 밖에 없어서 너무 무기력해서 눈물이 났다.
더이상 진해지지 않는 임테기
연휴가 끝나고 담당선생님 진료가 예약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임테기를 해봤는데 진하기가 어제보다 흐려진 것 같았다. 임테기가 흐려지면 화학적 유산이 진행되는 것이라고 했다. 1차때는 이 날짜에 대조선이랑 진하기가 비슷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병원에 갔다.
채혈을 하고 담당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선생님한테 지옥같은 구정 연휴를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이미 다 끝난 것 같다고. 선생님은 73이라는 수치만 보고 임신 축하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피가 계속 난다고 하니 끝날 때 까지 끝난게 아니라고 하면서 슈게스트를 또 맞고 가라고 하셨다. 저 진짜 끝난거같은데 왜 또 저 아파죽을 돌주사를 다시 맞으라고 하는건지. 어차피 보험 되니까 하는데 까지는 해보자 하고 주사를 맞고 왔다. 다행히 1cc여서 지난번보다는 반절만큼 아팠다.
거의 나흘만에 밖에 나와서 걸으니 좀 살 것 같았다. 내내 집에 누워서 안절부절 못하고만 있었으니까. 서울역에서 서대문역까지 슬슬 좀 걸었다. 바람은 거셌지만 그래도 공기는 깨끗했고 간만에 걸으니까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걷다보니 배가 좀 뻐근한 것 같아서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병원 전화를 기다렸다.
결과는 수치가 40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지금 갖고 있는 질정, 주사제는 다 스탑하고 다음주에 가져와서 환불처리 하라고 했다. 예상한 결과라서 생각보다 덤덤했다.
우리동산에서 화학적 유산이라는 말 보다는 화학적 임신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근데 워낙 화유라고 많이들 칭해서 나는 이 명칭이 좀 더 익숙했다. 시험관이나 인공을 한 것이 아니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그냥 이번 생리는 좀 피가 많이 나오네, 생리통이 좀 더 심하네 정도로 느끼고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 임테기들이 너무 잘 나와서 임신을 빨리 알아서 화유가 많은 것 처럼 느낄 수도 있고 시험관을 하면 계속 체크를 하기 때문에 빨리 알아서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화유를 잡아내서 마음이 더 아픈 것이라고.
인간의 몸은 잘 설계가 되어 있어서 유전자가 잘못된 배아가 착상하면 '어? 얘 이상한데?' 하면서 떼어내버린다고 했다. 초기에 벌어지는 모든 유산은 다 유전자 문제라고 했으니까. 종족보존의 원리에 따라 기형적인 유전배열을 가진 배아는 살아남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뭐 그런걸 다 떠나서 두번째 실패를 하고 나니 너무나 막막해졌다. 1차 때랑 똑같았다. 착상이 안되면 쿨하게 포기라도 할텐데 왜 또 착상이 됐다가 실패하는걸까.
선생님은 아직 두 번 밖에 안했는데 뭘 이걸 갖고 그러냐고 했는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다시 시험관을 한다 한들 더 힘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을 것 같고 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커졌다. 이러다 된다는데 대체 언제?
그리고 원래는 할머니 장례식에 갈 때 혹시 잘 안되면 신선 3차라도 하려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그 마음은 없다. 이번에 남편의 태도에 너무 실망을 해서 더 이상은 이 사람을 믿고 시험관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여태 시험관으로 고생한 것도 다 되돌려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실망했으니까. 시험관은 부부끼리밖에 의지할 곳이 없어서 둘이서 함께 단단히 손잡고 가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인데 남편은 내 손을 놨다.
유산에 대한 슬픔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나는 그래도 남편의 상실감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고 내가 많이 힘들어도 힘든 티는 좀 덜 내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자기도 힘드니깐 말시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배려를 내가 왜 했었는지 후회가 됐다. 마치 유산이 내 잘못인양 저런 말을 나에게 하는 것이 이해가 안갔다.
게다가 냉동 하나 남아있는 것도 폐기시키라고 했다. 우리가 어떻게 만든 냉동인데 그걸 폐기시키라고 할 수 있는건가?
굳이 따지자면 유산은 둘 다 똑같은 무게로 힘들 것이고 나는 거기에 몸까지 아픈데. 그럼 몸은 안 아픈 남편이 아내에게 따뜻한 위로라도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서로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인데. 친구가 건네는 위로만큼도 남편이 안하는 상황인데 이 사람을 어떻게 의지하지. 비단 시험관 뿐 아니라 앞으로 살면서 닥쳐올 위기에 부부가 합심하기는 커녕 자기 기분이 힘들다고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면서 탓을 한다면 내가 그걸 어떻게 감쌀 수가 있을까. '많이 아프고 힘들었지' 라는 위로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고 하기 힘든 것인가. 둘의 아이를 낳으려고 노력하다 안된 것인데 왜 나 혼자서 그 힘듦을 삭혀야 하는 것일까.
남편은 자기가 할 수 있는게 없는데 어떡하라는거냐고 했다. 할 수 있는게 왜 없는가? 전폭적인 심리적인 지지. 아프고 슬프고 힘들때의 위로. 그건 돈도 안드는데.
유산이 되었다는 것 보다 남편의 태도와 반응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같이 슬퍼하고 같이 다독이면서 같이 이겨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계속 혼자 울었던 것 같다. 1차에 계류유산이 벌어졌을 때도 남편은 그냥 '어쩔수 없지' 라고만 하고 따뜻한 위로 한번 건네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아이가 생겨서 낳게 된다면 이보다 몇백배 더 힘든 일들 투성이일텐데 그때마다 이 사람에게 상처받고 체념해 버릴 것 같았다. 내 아픔과 슬픔을 본인의 기분에 비해 하찮고 귀찮은 것 따위로 치부해버렸으니까. 남편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니까 모든 것이 자신이 없어졌다.
다음주에 병원에 가면 피검사 수치를 보고 차수 종결을 진행하게 될 것이다. 선생님은 신선 3차를 얘기했지만 남편은 남은 냉동 폐기를 얘기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폐기해버리고 싶지만 어떻게 만들어낸 냉동배아인데. 내 몸 아파 만들어낸 것이다 보니 남편말 처럼 쉽게 버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식하자니 자존심과 속이 너무 상한다. 해동하다 깨져버린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시험관을 시작할 때는 이 끝은 세사람이 되거나, 실패하더라도 전보다 더 돈독해진 우리 사이를 기대했다. 원래 힘든 일을 같이 겪으면 더 단단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