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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쥬스 Feb 23. 2021

누가 화유는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고 했는가

아침에 습관처럼 브런치 앱을 아무생각 없이 열었다.

뜨아아! 이게 무슨 일이고.

내 브런치 북이 브런치 앱 메인이라니. 늘 이 메인 자리는 누가 시켜주는 건가 맨날 부러웠는데 오늘의 주인공은 나다!! 이거 24시간 떠있을 텐데. 너무 신났다.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저 알림이 하루종일 앱을 열 때마다 떠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글 조회수는 다음 앱에 뜨는게 짱이고. (다음 앱+카카오뉴스창에 뜨면 조회수 폭발함)

브런치 작가로서의 긍지와 즐거움은 브런치 앱 메인에 걸리는 것인 듯 하다.


종일 주위 사람들한테 자랑했다.  '나 브런치 앱 메인에 뜬 사람이다' 라면서.




이 영광스러운 오늘은 슬프게도 신선 2차 완전 종결을 위해서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지난번 2차 피검이 40이 나오는 바람에 일주일 뒤 다시 채혈이 잡혀있었다.


정말이지 어떤 종류의 유산이든 간에 종료될 때 까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 마음도 이미 너덜너덜한데 피검사 때문에 병원에 계속 가야 한다는 것이. 


시험관은 피검 수치가 0이 되어야 차수 종결이 가능하다. 지금 난임 시술은 병원비가 일부 건보 적용이 되기 때문에 차수 종결을 안하면 안되는 것. 그리고 나처럼 난임시술비 정부지원금을 받은 경우에는 더더욱 마지막 피검 수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방에서 설차 다니는 사람들은 집 근처 산부인과에서 피검을 하면 검사 결과를 팩스로 병원에 보내라고 한다.


3차 피검에서 수치가 뛰면 그때부터 골치아픈 상황이 벌어진다. 수치 0 나올 때 까지 계속 피검해야 되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그리고 수치가 많이 뛰면 자궁 외 임신 판정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가면 종결일 것을 알고 있었다. 2주 가까이 출혈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중 열흘은 엄청난 출혈이었다.


누가 그랬나. 화유는 생리처럼 지나간다고. 거짓말. 아, 물론 그리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런 걸 보면 시험관 하면서 뭐 좀 안좋다더라 싶은 것들은 다 나에게 적용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생리 예정일보다 일찍 출혈이 시작됐다. 아마 이건 유산으로 인한 출혈이었던 것 같다. 슈게스트를 맞은 탓인지 출혈이 조금 줄어드는 듯 하더니 생리 예정일 지나고 나서 마치 둘째날 처럼 또 엄청난 출혈이 시작됐다. 이 땐 진짜 미치는줄 알았다. 아니 왜 생리 두 번 하는 기분이 드는거지? 피가 계속 나니 어지러웠다. 아무도 나에게 이 출혈이 언제 멎을 것이라고 알려주지 않았고 나는 그냥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화유는 생리처럼 지나간다며.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며. 근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든건데?  


병원에는 복통이 심하거나 패드를 흠뻑 적실 정도로 피가 많이 나면 그 때 오라고 했다. 응급실 갈 정도의 통증은 아니었고 출혈양도 견디려면 견딜만 한 정도라서 집에서 혼자 이걸 어쩌지 하면서 동동거렸다. 그리고 2주간 나를 괴롭히던 출혈은 참 희한하게도 병원에 오라고 한 오늘 아침 멎었다.




병원에 도착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냉동을 거의 포기한 상태로 이제 더 이상의 시술은 안하기로 해서 인지 지긋지긋하던 병원 원무과와 대기실이 이젠 다 끝난 것 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진료실 앞에 늘 20명씩 떠있는 대기순번, 지친 표정으로 기다리는 수많은 대기자들. 나는 이제 다시 이 공간에 안와도 되나? 과연 내가 냉동을 쓰러 여기에 오게 될까?


애증의 장소를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순서를 기다리는데 내 앞에 들어간 사람이 20분이 넘게 나오질 않았다. 뭐 하는데 이렇게 오래걸린담?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갔고 나는 더이상 시술은 안하고 싶다고 했다. 냉동만 쓸까 싶은 것도 고민이라고. 선생님은 어차피 냉동 한개는 의미가 없고 이걸 쓰고 시술을 종료 한다면 굳이 막지는 않지만 어쨌든 다음 시술은 두달 뒤부터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처럼 유산 때문에 충격이 커서 시험관 안하겠다고 하고 간 경우 다들 2년 정도 지나고 다시 병원에 온다고 했다. 그 때 되면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다면서.


난 다시는 병원에 안올거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다들 나처럼 말하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빠르면 1년 뒤에 오고, 늦으면 3년 뒤에 다시 오는 사람도 있다고. 지금 반복된 유산으로 너무 지친 상태니까 그냥 푹 쉰다고 생각하고 아무생각 하지 말고 4~5개월 지나고 나서 그 때 다시 생각해보라고. 병원은 어차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으니 내 마음만 결정되면 그 때 오면 된다고.


착상이 계속 된다는건 언젠간 성공한단 얘기라면서 다른사람들은 난자가 안나와서 매번 한, 두개씩 모으고 착상이 안되어서 계속 실패하기도 하는데 나는 상당히 좋은 상태인 편에 속하는데 지금 포기하는건 너무 아깝지않냐고 했다.


그 언젠가를 기다리느라1년 가까이 시험관 때문에 일도 못하고 아이를 멍하니 기다리느라 보내는 시간이 너무 힘들고 속상하다는 말이 불쑥 나왔다. 두 번이나 잘못되고 보니 이게 뭐하는 짓인지 싶다고. 공부나 일을 하라면 하겠는데 이건 더 이상 못하겠다고.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데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1차 때 계류로 힘들었을 때도 선생님 앞에서 운 적 없었는데. 그래서 선생님이 나보고 꽤 씩씩하다고 했는데 이젠 그냥 화유인데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펑펑 울었는지.


왜 갑자기 내가 선생님한테 그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난 늘 진료실에서 2분 컷이었으니까. 진료실에 각티슈가 있는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리고 10분, 20분 걸리는 환자들은 다 울다 나가는 사람들이라는걸.


진료실에서 다음 절차를 안내해주는 종이에는 이제 언제 오라는 말도 없이 그냥 '생리 2일차에 내원하세요' 한 줄만 써있었다.


여긴 차병원이고 수십년간 난임시술을 해왔을거다. 나 같은 케이스가 왜 없었겠는가. 수천, 수만건의 나와 유사한 사례들이 있었을거다. 그리고 나처럼 떠난 그들이 다 2년안에 다시 시험관을 하겠다면서 병원에 돌아왔었나보다. 그러니 선생님이 저렇게 호언장담을 하지.


남편은 병원 상술일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환자가 넘쳐나서 주체를 못하는 차병원이 뭐가 아쉬워서 나 하나를 잡겠는가.


그냥 여름까지는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지내보기로 했다. 어차피 여행업은 여름에도 복구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니 말 그대로 그냥 아무 생각 안하고 놀아야 될 것 같다.


미친듯이 싸웠던 남편이랑 부부 상담도 받고(상담센터에 예약을 해 두었다. 기본 6회는 상담을 해야 한다고 해서 매주 정해진 시간에 상담을 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도 맘껏 읽고 진짜 잉여롭게 한 번 있어볼까 싶다. 나는 나를 볶는 타입이라 진정으로 잉여스러움을 즐길 수 있을까 싶지만 나나 남편에게나 지난한 시험관 과정에서 온 심리적인, 육체적인 스트레스를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맞는 것 같다.


피검 수치는 잘 떨어졌고 2차 시술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작년에 병원서 나온 진료기록지와 영수증이 책한권 분량이었다. 기분전환 겸 모두 파쇄해서 버렸다. 임신확인서도 껴있길래 그건 그냥 기념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1차에서 계류가 안되었다면 21년 5월 21일이 출산 예정일이었을 것이다.




내 브런치에 달린 여러 응원 댓글들 중에 그 말이 기억이 난다. "남들 쉽게 되는 임신이 왜 나만 안되냐고 절대 자책하지 말라"는 말.


안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나는 근 40년 간 살아오면서 그렇게 큰 실패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입시나, 취업같은 열심히 하면 되는 것들은 다 그럭저럭 해냈으니까.


시험관 실패는 충격이 너무 컸다. 아무나 되는 것 같은 임신이 나는 왜 안될까에 포커싱이 맞춰지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답이 없다. 아이는 인생을 잘 살았고 못 살았고를 따져서 받는 선물같은 것이 아닌데 마치 여태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와서 남들은 다 받는 그 선물같은 아이를 나만 못 받는 것 같은 심리적인 패배감이 어마어마했다.


'그러게 낳으랄 때 낳지', '결혼 하고 바로 낳지  안낳는다고 하다가 이제 낳겠다 하니 안생기지' '남들은 나이 많아도 애가 바로 생겼다더라' 등의 이야기들 때문에 상처가 정말 컸다. 내가 20대에 결혼을 했다면 몰라도 어차피 나는 34살에 결혼했고 애 낳기에 그닥 빠른 나이도 아니었는걸.


내가 딩크였을 때는 내 동생이나 친구들의 임신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 땐 아이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 축하도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내 주위에 시험관을 하고 있는 사람들, 임신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 임신에 성공하면 내가 그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건넬 수 있을까? 아마 지금의 내 마음 상태로는 못할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삐딱하고 편협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너무 비참하고 슬펐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 마음이 나아지면 그들에게도 다시 진심으로 축하한단 말을 건넬 수 있겠지. 이제는 왜 임신이 안될까 라면서 자책하며 내 안의 나를 갉아먹는 것 보다 '안될 수도 있지'라며 툭 털어내버리는 시간이 정말로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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