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유로 종료된 신선 2차를 끝내고 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땅파고 들어갈 바에야 차라리 바쁜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일을 다시 시작했고, 최근 유산 후유증이 한꺼번에 폭풍처럼 몰아쳤는지 일 시작한지 한달만에 입술이 엄청나게 부르트고 몸살이 나서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시험관을 안하니까 정신은 평온하다)
생전 먹지도 않던 홍삼을 내돈주고 사먹으면서 버텼다. 아마 내 몸에 잘 받는다 했다면 멍멍이도 먹었을지도 모른다. 정력에 좋다면 바퀴벌레도 먹을거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왜인지 알 것도 같았다. 너무 힘들고 아프고 지쳐서 면역과 체력에 처절하게 집착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산 후 이제 난임병원은 가지 않기로 남편과 결정을 하고 나는 그 결정이 이제 난임의 끝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매우 큰 오산이었다.
난임의 판정을 받는 기준은 만 35세 이상 피임 없이 6개월간/ 35세 미만 1년간 아이가 안생겼을 때다.
저 기준은 부부가 '우리 이제 아이를 갖자' 라고 해서 말 그대로 임신 준비에 돌입한 후에 아이가 안생긴 기간을 말한다. 임신 준비는 몸에 나쁜 것 안하고 몸에 좋은 것만 하고 배란기 맞춰서 관계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무엇일까? 이렇게 되면 일단 피임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임기와 생리시작의 사이에서 여자들은 기대와 실망과 걱정과 우려를 무한 반복하게 된다. 임신이 되어도(난 경험자니까) 예정일이 다가오면 생리전과 비슷한 여러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수많은 증상놀이 지옥이 시작된다. 그냥 소화가 잘 안되어서 속이 안좋은건데 입덧인가? 이러기도 한다.
여성의 호르몬 주기를 봤을 때 보통 생리시작일로부터 14일째가 배란일이고 그 전후 3~5일씩을 가임기로 본다.(배란이 언제 될지 모르기에) 여기에 정자의 생존날짜까지 계산하면 실제적으로는 생리시작전 2~3일과 생리기간중 정도만 비가임기로 보는게 맞을 것 같다.
혹시라도 내가 가임기에(약 3주나 된다!) 술을 마셔서,약을 먹어서 등등의 행동을 하면 나는 그로인해 내내 걱정을 안고 살아야만 한다. 나는 그렇게 3년째 살고 있다.
처음에 아이를 낳기로 결정을 하고 나서 내가 맞닥뜨린 것은 가임기에는 약국에서 약을 사먹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배탈이 났는데 설사약을 먹을 수 없었고 비염으로 콧물이 줄줄 나는데 알레르기 약을 먹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아이를 갖자고 하고 두달 쯤 뒤에 교통사고가 났다. 남편은 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나는 입원을 안시켜줬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물론 피투성이로 여기저기 부러졌으면 임신이고 뭐고 실려갔겠지만 그정도 사고는 아니었다)
건강검진을 해야 했기에 병원에 갔는데 흉부엑스레이를 찍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치과에서 충치 파악을 위해서 치아 엑스레이를 찍는데 그걸 찍을 수 없어서 의사가 육안으로 대충 보고 진료를 했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손목이 삐어서 한의원에 갔는데 효과 빠른 약침은 안된다고 했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코로나가 터지기 전 장거리 해외출장이 잡혀도 갈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처음에는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셨다)
그놈의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때문에 나는 배란일 전부터 몸이 아파도 약을 먹을 수 없고 주말에 기분내자고 술도 마실 수 없고 검진때 엑스레이도 찍을 수 없었다. 교통사고가 나서 뒷 차에 제대로 들이받혔는데도 약도 쓸 수 없고 한방치료도 안된다고 했다. 그게 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때문이었다. (결국 잘못되어도 내가 책임진다고 하고 입원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생리가 시작되면 약도 먹고 술도 먹고 액스레이도 찍고 했다. 생리 기간에는 면역이 매우 다운되는 시기인데 그 시기만 마음편히 약을 먹고 술을 마실 수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했다.
처음에는 혹시라도... 싶어서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지켰다. (하다못해 초반엔 파인애플이랑 율무차랑 팥 들어간 음식도 안먹었다) 그런데 장기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슬슬 이 패턴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아이가 생겨서 낳아버리면 이후엔 나는 이제 맘대로 몸 아프면 약도 먹고 술도 마시고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의 무한루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텐데 이건 무슨 끝도없이 배란일과 생리예정일을 계산하면서 가임기에는 약도 못먹고 생리가 시작되면 약을 먹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이 악순환을 끊으려고 난임 병원에 갔지만 결국 유산 두 번을 겪고 병원 내원은 자체 종료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의 고리가 끊어졌을까?
네버.
난임은 병원에서 시술하는 동안에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만 시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을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난임을 종료한 것이 아니라 그냥 단지 병원에 가지 않기로 했던 것 뿐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제 난임병원에는 가지 않지만 아이는 생길 수 있을 수도 있는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버렸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의 무한 루프가 시작이 된 것.
얼마 전 시험관 때문에 못했던 자궁경부암 국가검진을 하러 동네 산부인과를 방문했고 겸사겸사떨어진 면역땜에 생긴 염증 치료도 받아야지 싶었다. 하지만 의사 왈 생리 시작전에 관계가 있었으면 항생제는 못 준단다.
아. 또 시작됐구나.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이쯤되면 이건 내 인생의 장벽이다.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로 시작되는 3년째 지속되는 모든 금지 신호.
그렇게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갖고 생리를 기다렸고 그마저도 못기다리겠어서 생리 4~5일전에도 반응이 나온다는 얼리테스터기를 다시 샀고임테기에 마치 희미한 실선이 보이는 것만 같은 착각에 시달렸다.
테스터기가 배송오기까지, 생리 4일전이 되기까지 또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 나 어제 맥주 마셨는데. 와인 마셨는데. 감기기운이 있어서 약먹었는데. 아이 준비하는데 술을 끊으면 되지 않느냐고? 아이 준비하는데 아프면 타이레놀이나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게 3년째였다. 남편은 술을 끊지 않았고 나도 애주가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임산부도 먹는다는 타이레놀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난임으로 배란기와 생리기 사이에서 핑퐁당한지 3년이니 나도 이제는전처럼 배란기나 가임기 따위는 잊고 맘 편히 살고 싶었다.
결국 아침에 한 줄이 뜬 임테기를 집어던지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나서 남편한테 폭풍 화를 냈다.
나 더 이상은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이게 지금 3년째라고. 자연적으로 생기지도 않는 아이 때문에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가임기와 생리 사이에서 '혹시라도 임신일 수 있으니까' 의 무한루프를 타야되는거냐고.
남편은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앞으로는 피임을 하겠다고 했다.
이게 과연 해법일까.
난임을 완벽히 종료시키는 것은 아이를 낳거나 / 부부가 임신을 더이상 기대하지 않고 피임을 다시 시작하는 상태인 것 같다. 막연히 아이가 안 생기겠거니 하면서 지내는 것은 여자에게는 너무나 큰 리스크이니까. 시험관을 그렇게 해도 안생겼던 아이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하니 생겼다는 얘기들이 많지 않은가?
남편은 어차피 안생겼던 아이인데 무슨상관이냐고 했는데 나는 아니었다. 갑자기 생길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 갑자기가 언제일줄 알고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임신준비중의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래 뭐, 그렇게 덜컥 나중에라도 아이가 생기면 좋은 일이지만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과정에는 지난한 여자들의 마음고생이 있다. 언제까지 여자만 '아이 준비중'의 상태로 살아야 하는 건지. 나는 이제는 '아이 준비중'이라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오는 것 같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의 경력단절이라든가 출산과 육아로 인한 몸의 망가짐, 산후우울증이라든가 뭐 이런 문제는 아직 발생하지 않아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이것 역시 숨이 막힌다.
만일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주말이면 술을 마시고 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했다가 갑자기 아이가 생기게 되면 결국 모든 죄책감은 다 여자가 떠안아야 한다. 이쯤 되면 임신에서 남자가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길법도 하다. 임신 준비에 남편은 뭘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나에게는 해야 할 일, 주의해야 할 일 백만가지를 말하던 산부인과 샘은 말씀하셨다. "남편한테 담배나 끊으라고 하세요~ 남자는 그거 말곤 할 거 없어."
아, 왜 아이는 여자의 일상을 담보로 잡아야 하는 것일까.
이제는 난(難)임도 싫고 인생을 어렵게(難) 살고 싶지도 않다. 그간의 고생이 충분히 길지 않았나...? 일에 지쳐 퇴근 후 맥주 캔을 따면서도 한편으로 혹시 아이가 생겼는데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닌가 싶은 걱정을 하지 않는 날이 과연오기는 할까?막막하기 짝이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