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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y 08. 2022

소설가의 영화

보자마자 쓰는 잡문

 <소설가의 영화>를 보기 전 <극장전>, <하하하>와 같은 00년대의 홍상수 영화를 자주 봤다. 그 시절 영화 속 인물들은 참 연애와 섹스에 미쳐있었더라. 특히나 그 시기에 자주 등장한 김상경은 섹스에 미친 숫컷같다. 이전엔 그런 순수한 광기를 무척 징그럽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언동들이 무척 귀엽다. 나도 나이가? 든 건가 싶기도 하고 ㅋㅋ

 여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연한 소리지만 그 시절 홍상수의 영화와 지금 홍상수의 영화는 정말 다르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제 싸구려 모텔 방에 묵지 않는다.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나름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해서 곧장 에로틱한 관계로 진전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어떠한 시점을 지나 홍상수의 영화는 이전보다 계급적이고 교양있는 룸펜이나 사교계 사람들의 이야기가 됐다. 언제부턴가 홍상수 영화에서 걷는다는 건 지시어로만 등장하거나 혹은 택시를 타고 이동하던 시간들이 이제 외제차를 타고 이동하는 인물들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내가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른 계층의 이야기로 변해버렸다. 적어도 홍상수의 영화가 매 번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누군가 이야기할 때,반박을 위해 눈에 보이는 예시를 들어야만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달라졌다고 말하겠다. 이런 이유로 그의 영화가 싫어졌다거나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건 물론 아니다. 오히려 나는 홍상수가 자기 계급을 인지하고 적어도 기만하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그 신도시에 거주하며 바라본 그의 시선들이 참 뭐랄까 부럽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부터였을까 나는 홍상수가 유리창과 프레임 밖을 인물들의 인지 시점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혹은 하나의 공간에서 두 인물이 원활한 상호작용을 이루지 못하는 장면들을 계속해서 삽입했을 때, 그 배제와 단절이 하나의 매개가 되어 생성하는 시네마틱한 효과에 눈길이 가곤 했다. 그래서인지 마주 본 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가벼운 신체접촉 조차 대단한 사건 처럼 받아들여지곤 했다. 예컨대 <인트로덕션>의 세 번 째 파트 속 두 남자의 포옹이나 <당신 얼굴 앞에서> 의 후반부 이혜영에게 담배를 비춰주는 권해효와 그걸 비스듬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나는 앞서 내가 언급한 00년대 영화들에선 본 적 없는 어떤 조심스러운 태도나 호기심, 혹은 두 대상 사이에 발생하는 상태 변화에 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런데 <소설가의 영화>는 그런 지적에 관해 응답이라도 하듯, 장소와 지시 대상을 너무나 명징하게 가리키는가 하면, 유리창 안팎의 인물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환대하는 것이 <소설가의 영화>가 주는 가장 큰 당혹스러움이다. 이 영화의 몽타주는 마치 네비게이션 처럼 대사로 목적지를 일러준 뒤 그곳을 차례로 방문하는 그야말로 상투성으로 직진하는 영화라 보는게 맞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삽입한 꽃을 든 김민희의 영상,(영화라기 보단 나는 이걸 사적인 영상이라고 왠지 표현하고 싶다.) 을 보고 지금으로선 형용하기 어려운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그건 이 효과가 너무나 일종의 치트키처럼 당연히 감탄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효과라서인지, 아니면 그가 이 영화에서 일관되게 유지한 그 정직함에 항복한 것인지 아직 감이 잘 안잡힌다. 여튼 소설가의 영화는 참 좋고 그 사랑하는 사람들과 풍경을 더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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