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모두 부업일 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본업이다. 부업에 목숨 걸지 말고 본래의 할 일로 돌아오라. 재가 되기 전에.’
그런 문장을 읽고 난 밤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나는 부업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으니까. 내 걱정과 내 마음은 모두 내 부업의 것이니까. 결단코 내가 그들을 소유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언젠가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고, 그제서야 양손에 꽉 쥐고 있는 부업을 놓아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그런 내가 쉽게 변할 거라는 망상은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 하지 않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가 결심만 하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어렸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나는 사람은 어떤 포즈(pose)로 조형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각자만의 포즈가 정해진 채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부서지고 무너지지 않은 한 우리의 포즈는 변할 수 없다고. 어떤 사람의 포즈는 간절하고, 어떤 사람은 거만하고, 또 누구는 평온하겠지만 나의 것은 좀처럼 이 ‘부업’을 놓을 수 없는 다급한 사람일 것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스스로를 연민하고 싶진 않지만, 내게 있어 이 삶은 언제나 나의 흥미나 적성보다는 돈벌이가 먼저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 나는 다급하게 조형된 대로, 항상 돈 문제를 가장 다급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만 몰두하며 살았다. 아니, 살고 있다. 이보다 시급한 문제는 없다.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이지 않는 것보다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정작, 진실로 자명한 문제는 신은 오직 조형만 했을 뿐 그대로 굳어진 데에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에 대한 책임으로 나를 모른다는 벌을 받고 있다. 아마도 분명히 그렇다. 나를 몰랐기 때문에 항상 나의 기호에 위배되는 선택을 했고, 나를 몰랐기 때문에 한참을 지날 때까지도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를 속이기만 했을 뿐이다. 나는 괜찮고, 이 삶은 나무랄 데 없으며, 번듯한 내 삶의 태도는 지적할 곳이 없다고. 나는 행복하다고. 내가 내 삶에 떨어댄 가장 큰 위선일 것이다.
그러나 위선보다 두려운 것은 나에 대한 나의 무지가 언젠간 타인을 상처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타인을 깊게 살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은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하게 만들고, 최악의 결과를 낳게 한다. 그리고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변덕을 부릴 것이고, 나의 말을 번복할 것이다. 이런 걸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같이 있고 싶은 줄 알았는데, 실은 혼자 있기 싫었던 거였어.
같이 있고 싶다는 욕구와 혼자 있기 싫다는 감상 사이에는 깊고 넓은 간극이 존재한다. 같이 있고 싶다는 욕구에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지만, 혼자 있기 싫다는 감상에는 혼자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이 숨겨져 있다. 이런 감상은 남들과 함께하는 순간 사라질지 모르지만, 금세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드러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나에 대해 모른 채로 상대방에게 ‘함께’를 제안했다가 금방 ‘싫증’을 내게 된다면 상대방은 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나에 대한 벌은 내가 지고 싶다. 이 벌에 대한 책임은 홀로 감내하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이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다. 내가 간과한 나의 어떤 모습 때문에 내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나의 변덕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나에게만 부리고 싶다. 아무도 모르게. 그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과는 별개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하나의 인간으로 온전히 작동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