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엄마에게 보내는 응원
"엄마 시니어 모델 학원 등록했어"
"응?"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엄마는 쑥스럽다는 듯 작게 말을 꺼냈다. '미쳤냐', '돈 아깝다'는 등의 소리를 들을까 봐 아빠, 이모 포함 주변에는 다 비밀로 하고, 나한테 처음으로 털어놓는 거라고 했다.
나도 순간 "아우 주책이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갑자기 왜 시니어 모델을 하고 싶은 건지 이유를 물었다.
"그냥 옛날부터 하고 싶었어"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래, 누구나 가슴에 평생 품고 사는 꿈이 하나 둘 있지. 이건 순전히 엄마의 취미 생활이고 나한테 학원비를 지원해 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도 아닌데, 진심으로 응원해 주자. 여태까지 엄마가 나의 꿈과 온갖 욕망들을 묵묵히 지원해 줬듯이.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의 8할은 엄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를 닮아 천성적으로 정이 많고, 쾌활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태어난 이후 이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경기도 시흥이라는 작은 세계를 전부로 알고 있던 내가 유럽, 미국, 아프리카 등 저 멀고도 큰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도 무조건적인 엄마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엄마는 "뭐든지 경험해 보는 것이 최고다"는 신조로 나를 키우셨다. 덕분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시야를 확장하고, 내가 걷고 싶은 길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
2000년의 어느 날 엄마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를 발레 학원에 데려갔다. (당시만 해도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감을 키우고, 목이 짧은 내 체형을 교정하기 위해 발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애가 무슨 발레냐며' 반응한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에는 꽤나 비쌌던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정주부였던 엄마는 공장에 취직하셨다.
나의 첫 해외 경험도 강력한 엄마의 지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중국 연태에 배영학교라는 곳에 문화 교류 차원에서 다녀오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단짝 친구들이 간다기에 집에 가서 나도 보내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역시나 아빠는 '무슨 중국이냐'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들은 다 가는데, 왜 우리 집은 안 보내주냐'면서 아빠가 야속해서 화도 내고 엉엉 울었다. 엄마가 끈질기게 아빠를 설득한 끝에 나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낯선 중국 땅을 밟으며 문화 충격으로 가득했던 강렬한 경험을 꽤나 어린 나이에 할 수 있었다.
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반대한 적이 있었는데. 아프리카 말라위에 1년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선언했을 때 이때는 정말 내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 때문에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셨다.
"엄마 재수 없으면 한국에서 그냥 길 걸어다가도 죽을 수 있어. 그럴 거면 아프리카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볼래"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내 한 마디에 엄마는 "그래 네가 이겼다"며 허락해 주셨다.
올해 나이 환갑, 엄마의 도전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골프, 벨리댄스 그리고 시니어 모델까지. '뭐든 경험하는 것이 최고의 가르침이다'라는 나를 키웠던 신조를 당신에게도 몸소 실천하고 계신 것이리라. 이런 열정과 에너지가 어디서 솟아나는 건지... 내 엄마지만 대단할 따름이다.
시니어 모델 학원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시흥에서 강남까지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대중교통으로 오고 간다는데, 혹여나 사람 가득한 만원 지하철에서 앉지도 못하고 내내 서서 가는 건 아닐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찡해진다.
몇 년 전부터는 벨리댄스에 푹 빠지셨는데, 매일 집에서 영상을 보면서 연습하고 요즘에는 틈틈이 공연도 다니신다. 화려한 공연 의상을 입고 한껏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을 한 사진 속의 엄마를 보면 발레 콩쿠르, 공연에 나갔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혹여나 실수는 하지 않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관객 속에 앉아 있던 엄마의 자리가 이제는 내 자리가 되었다.
엄마의 다음 공연에는 꽃 한 다발 사서 응원하러 가야겠다. 나는 엄마의 1 호팬이니까.
Photo by Sandra Seitama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