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여행에서 깨달은 것
퇴사 후 휴식을 위해 태국 치앙마이로 떠났다. 4박 5일의 일정 속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각에도 나는 여전히 치앙마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배회하고 있자니 느낌이 이상했다.
'과연 나는 오늘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맞을까?'
'혹시 비행기 시간을 착각하고 이미 놓친 것은 아닐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치앙마이 시내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비행기 일정 때문.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스타항공의 출발 시간은 자정에 가까운 11시 45분이었다. 아시아나 항공 등 다른 항공사의 일정도 대부분 비슷하다. 치앙마이 공항은 시내와 매우 가깝고, 공항의 규모가 크지 않아 수속 절차를 밟는데도 얼마 걸리지 않아서 보통 오후 10시 즈음 공항에 도착해도 여유로운 편이다.
그간의 국내, 해외여행 경험을 되돌아보면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보통 여행의 마지막 날은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이나, 비행기/기차 등의 교통편 일정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여행이 주는 '설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 집으로 가기 위한 이동에 대한 약간의 스트레스를 느끼며 하루가 흘러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치앙마이에서는 늦은 한국행 비행기 출발 시간 덕분에 여행의 마지막 날을 Full day로 즐겨볼 수 있게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현지에서의 마지막 날을 즐길 수 있으니 처음에는 '개이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나를 지배한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인데 왜 100% 즐기고 있지 못할까?' 누가 글 쓰는 사람 아니랄까 봐 부정적인 감정이 퍼지는 이유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곱씹었다.
여행의 초반부에는 아직 남은 날들이 있으니 '오늘 못가도 내일 가면 돼'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그런 여유가 없다. 오늘 가지 않으면, 오늘 사지 않으면, 오늘 먹지 않으면 그다음의 기회는 사라진다.
구글 맵에 촘촘하게 저장해 놨던 각종 맛집과 볼거리들이 눈에 밟혔다. 지인의 강력 추천을 받아 정말 가고 싶었던 식당이 있었는데 이동 동선이 비효율적이어서 포기해야 하기도 했다. 한정된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욕심에 어디를 가서 시간을 보낼 것인지, 무엇을 먹을 것인지 등 사소한 선택에 신중해지게 되고, 그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에 대한 아쉬움이 커져만 갔다.
기념품 쇼핑을 하면서 일종의 포모증후군(FOMO: Fear Of Missing Out)에 빠진 것 같았다. FOMO는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증상으로, 각종 SNS와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는 많은 정보로 인해 요즘 많은 사람들이 남들보다 마치 뒤처지는 것 같고,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나는 원래 여행을 할 때 쇼핑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여행 캐리어 안에는 여유 공간이 없거니와, 순간의 행복한 감정으로 구매한 현지 감성이 가득한 귀여운 소품들은 한국에 돌아오면 예쁜 쓰레기가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주변 지인들이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섬세하게 챙겨준 선물을 받기만 했던 게 미안해서 이번에는 일부러 기념품을 구매하려고 노력했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니 피부 트러블 진정에 좋다는 '할머니 비누', 조금만 써도 엄청 개운하다는 '콩알 치약', 트리트먼트, 호랑이크림 등 각종 기념품 리스트가 넘쳐났다. 현지에서 꼭 사가야 하는 물건이라고 글 쓴 사람이 강조하니 왠지 사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현지에서 유명한 마트를 가니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나는 말린 망고를 구매하려고 왔는데 저 사람들은 과연 장바구니에 뭘 담을지 궁금해졌다. 문득 여기에서 다들 꼭 사가는 유명한 제품이 있는데, 나는 그걸 놓치는 건 아닐지 불안해졌다.
게다가 여행 마지막 날의 한정된 예산도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남은 바트(THB)를 다 털어야 했기 때문에 예산 수중에서 합리적인 소비를 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이어졌다. 추가로 환전하는 것은 애매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만 예산에 맞지 않는 기념품은 포기해야 했다.
물리적 거리와 시차 덕분에 여행 내내 떠나온 한국에 대해서는 잊고 100% 치앙마이 여행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일은 뭐 하지?' 설레는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마지막 날이 되니 그동안 애써 잊고 있었던 현실이 스멀스멀 생각이 났다. 한국에 돌아가면 해야 할 투두리스트들이 떠올랐다. 퇴사 후 이직을 하게 되어 9월 초 새로운 회사 출근을 앞두고 있다. 몸은 아직 태국에 있었지만, 벌써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여행과 현실의 중간에 걸쳐 있다. 잠깐의 일탈을 마무리 짓고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기 때문에 여러 오묘한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기존의 회사의 끝과 새로운 회사의 시작 사이에 다녀왔던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휴식'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혼자서도 외롭지 않게 모든 시간을 만끽하며 나만의 여행의 기술을 터득하기도 했다.
여행의 마무리는 늘 아쉽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발 붙여야 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여행은 더욱 특별한 것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