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또 다른 길이 열릴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생퇴사하는 일 없을 거야!
몇 달 전만 해도 남자친구에게 호언장담했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참고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확정 지은 다음에야 그만둘 것이라고.
그런데 지난주 금요일 결국 참지 못하고 퇴사 선언을 해버렸다. 한 달 뒤에는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인 신분이 된다. 평소에 퇴사를 하고 싶어 하는 주변 지인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환승 이직을 하라고 조언을 했었는데. 정작 내 일이 되어버리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홧김에 나온 즉흥적인 퇴사 선언은 아니었다. 한 달 전부터 나를 둘러싼 회사와 팀의 상황이 급격히 바뀌었다.
그 시작은 정리해고. 우리 회사는 커머스플랫폼인데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15% 정도 되는 직원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작년 경기 불황으로 기업마다 매서운 정리해고 칼바람이 불 때 우리 회사는 큰 탈 없이 지나가는가 보다 싶었는데 순서가 조금 늦었을 뿐 결국 찾아온 것이다.
사업 성과가 잘 풀리지 않아 평소에 애물단지 같은 눈도장이 찍힌 부서라 아마 대다수는 우리 쪽의 타격이 클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벌어오는 B2B 조직이라는 이유로 회사의 메인 사업인 커머스 플랫폼이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 우리 부서는 용케 살아남았다.
하지만 첫 번째 순서가 아닐 뿐 다음번 정리해고 사이클에는 우리가 대상이 될 확률이 높았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랐던 우리의 생존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함이었을까? 위에서부터 성과에 대한 압박이 거세져오기 시작했다.
부족한 점도 물론 있지만 그래도 빠른 실행력으로 같이 협업하는 동료들과 소통을 촘촘히 하면서 일하는 스타일이기에 사회생활 1년 차 햇병아리 시절을 제외하고 내가 일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작정하듯 던져지는 새로운 업무와 기존 업무에 더 무겁게 요구되는 책임감, 부족한 부분을 파고드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피드백의 폭격은 마치 나를 무능력한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자존감은 뚝뚝 떨어졌다.
분노가 차올랐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던 업무인데 왜 갑자기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는 거지?"
"최선을 다해 처리하고 있는 주요 업무에 대해서는 왜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거지?"
"지금 안 그래도 혼자서 맡고 있는 일이 많은데 왜 나의 상황 체크도 없이 끊임없이 새로운 업무를 던지는 거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출근하는 길, 링크드인에서 지인의 글이 내 눈에 들어왔다.
유능한 직원을 무능하게 만드는 5단계
1. 작은 실수에서 시작되는 의심 : 상사는 직원의 사소한 실수를 발견하고 그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2. 자존감과 동기의 저하 : 상사의 의심은 직원의 자존감과 동기를 약화시킨다.
3. 감시와 통제의 강화 : 상사는 더욱 철저한 감독과 세부적인 보고를 요구하게 된다.
4. 업무 성과의 저하 : 직원은 점점 의욕을 잃고 성과가 떨어지며, 상사와 갈등을 빚는다.
5. 무능한 직원으로 전락 : 결국 직원은 무능하고 예의 없는 직원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을 '필패신드롬'이라 부르며, 이는 직원이 낮은 기대치에 맞춰 성과를 내게 하고, 개인과 조직 모두를 실패로 이끈다. 관찰 결과, 상사의 부정적인 시각이 직원의 실제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Nathan Park Linkedin, '장 프랑수아 만초니 <필패신드롬> 중' -
내가 괴로워하는 상황과 100% 일치해 소름 돋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견디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나를 무능력하게 만드는 상사와 더 이상 함께 일하기 힘들겠다는 결심이 섰다.
이미 생퇴사 쪽으로 마음은 기울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해 누군가 뼈 때리는 조언을 해주면서 내 퇴사를 말려주길 반쯤 바라는 마음으로 주변에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생퇴사를 하고 쉬면서 이직을 준비한 지인 2명에게 물어봤다. 나의 준비되지 않은 퇴사 통보를 말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말 추천한다고 했다. 스트레스받으면서 버티는 것보다 결국 내가 우선이니 쉬면서 이직 준비를 해도 충분하다고 했다.
환승이직을 했던 지인들에게도 물어봤다. 이들은 무조건 환승이직을 추천한다고 했다. 생퇴사를 하면 불안감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이 조급해져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의견이 갈렸다. 결국 두 그룹 모두 자신들이 한 선택에 대한 후회가 없었고, 그 경험의 좋은 면을 나에게 추천해 줬다.
'그래, 정답은 없는 거구나'
생퇴사와 환승이직 각자 나름의 장, 단점이 존재한다. 어떤 부분을 더 크게 보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
'그 많은 회사 중에 내가 갈 곳 하나 없겠어?'
자신만만했는데 서류 탈락만 5곳이 넘는다. 그동안 다녔던 회사들에서 다양한 업무를 주도적으로 진행하면서 인정을 받았기에 어디 가도 꿀리지 않을 탄탄한 경험을 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당황스럽다. 바깥 상황은 생각보다 더 팍팍하고, 뛰어난 인재의 경쟁 속에서 나는 생각보다 무색무취의 후보자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불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퇴사 통보를 한 나의 선택이 후회는 되지 않는다.
조급하지 않기로 했다. 6년 넘게 쉬지 않고 일하면서 달려왔으니 이참에 여유롭게 쉬면서 에너지를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링크드인 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료 마케터에게 커피챗을 신청하면서 다양한 업계 이야기를 나누고, SQL 등 마케터로서 필요한 직무적 스킬을 배우기 등 할 건 정말 많다.
면접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서류에서 탈락하니 괜히 오기가 생긴다. 회사의 네임밸류가 나의 가치를 한정 짓지 못하게, 퍼스널 브랜딩을 통해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키워야겠다는 목표도 생겼다.
얼마 전 인사이드아웃 2 영화를 봤다. 나는 워낙 긍정적 사고 습관이 굳어져서 평소에 불안이라는 감정을 잘 안 느끼는 편이다. '불안'은 좋지 않은 감정이라 인지했었다. 그러나 영화 덕분에 '불안'이라는 감정의 순기능을 인지하게 되었다. 결국 불안은 미래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함으로써 미래에 다가올 리스크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직이 빨리 안 돼서 3개월 넘게 백수 상태면 어떡하지' 불안함을 느낄 때마다 콘솔을 조종하고 있는 불안이가 눈에 선명히 그려진다.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려고 이런저런 의문을 품고 이에 대비하는 방안을 떠올리는 내 안의 불안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불안이도 고맙지만 그래도 얼른 기쁨이가 다시 조종대를 잡고 새로운 여정으로 향하는 길로 나를 이끌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Photo by Kees Streefkerk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