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멜라토닌이 필요하다
어릴 때는 흐리고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외향적인 성향을 타고난지라 밖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했다. 비가 오면 세웠던 활동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날이 흐리면 덩달아 기분마저 다운되니 흐린 날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나둘 나이를 먹어가면서 좋아했던 것도 싫어진다. 이십 대에는 불금이면 홍대나 이태원 클럽에 가서 친구들과 노는 것을 즐겼는데 이제는 그저 상상만 해도 피로감을 느끼며 그 근처에도 가기 싫다. 반대로 싫어했던 것이 좋아지기도 한다. 이제는 쉬는 날에 날이 흐리면 오히려 좋다.
예전에는 주말 이틀을 스케줄로 꽉꽉 채워서 활동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이제는 삼십 대의 몸에 이십 대의 활동을 그대로 이식하면 그 피로의 여파가 며칠 동안 지속된다. 토요일, 일요일 모두 날이 밝다면 분명 어떻게든 밖에 나가야 하는 이유를 만들었을 텐데. 비 오고 흐린 날은 강제로 차분히 쉬어갈 수 있어 쉼을 제공해 준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분비는 줄어들고, 멜라토닌(melatonin)이라는 수면 호르몬의 분비가 증가한다고 한다. 멜라토닌이 증가하면 몸은 자연스럽게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신호를 받아들이게 되어, 에너지가 줄어들고 무기력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역시 우리는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존재들이다. 옛날에는 애써 부정했다면, 삼십 살을 넘게 살아보니 이제는 내 몸에서 멜라토닌의 분비가 늘어나는 것을 반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여행 중에도 흐린 날을 맞이했을 때 오히려 더 값진 경험을 하기도 했다.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3월 화창한 봄의 제주를 향한 기대를 가득 안고 떠난 여행인데 일정 내내 비가 오고, 거센 파도로 인해 우도로 가는 배편도 취소되어 원망스러웠다.
머물던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아침 명상 수업을 들었는데,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불 때 극복하려고 애를 쓰면 오히려 더 어긋나요. 그냥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세요."
그 말이 내 마음을 톡 건드렸는지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제주도에 와서야 비가 오면 젖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바깥의 날씨와 상관없이 내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도 함께.
맑고 화창해야 한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받아들이니 비바람 불고 흐린 제주도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