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이 활짝 핀 봄의 제주도를 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서 마음껏 책을 읽고, 글쓰기에 집중하며 일로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어졌다.
1월 달에 일찌감치 항공권과 숙소 그리고 렌터카 예약을 마치고, 제주도로 떠나는 3월 만을 기다렸다. 출발하기 며칠 전, 무슨 옷을 챙겨갈지 고민하며 날씨를 확인했는데 내가 머무는 5일 내내 비가 내린단다. 행복으로 가득 차 있던 상상에 갑자기 균열이 생겼다. 그래도 제주도의 날씨는 워낙 예측 불허니, 기적같이 비 구름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어느 과학적 근거도 없이 일명 날씨 요정이라고 종종 불린 나의 운을 믿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은 이번에는 나의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출발 당일 아침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우도 게스트하우스의 사장님이었는데, 강풍주의보로 배가 운항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급하게 다른 숙소를 찾아 예약을 해야 했다.
불행은 또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원래의 계획은 진행해오던 웹사이트 리뉴얼 프로젝트를 한 주 전에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제주도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계속 일정이 지연되면서 결국 제주도로 떠나는 날까지 끝내지 못했다. 내 휴가는 1월부터 계획되어 있었지만 마치 내가 자리를 비움으로써 프로젝트 마감이 더 연기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오전 재택근무를 겨우 끝내고 공항으로 출발하는데 벌써 이미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렇게 다운된 상태로 떠나는 여행은 처음인 것 같았다. 김포공항역에 내려서 캐리어를 끌고 긴 무빙워크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한 것처럼 느껴졌는지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마음으로 여행을 간다고 과연 즐거울까? 의문이 들었지만 이런 상태로 집에 남아 있으면 더더욱 출구 없는 우울함에 갇힐 것 같았다.
1월부터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루 이틀도 모자라서 5일 내내 비가 내리는 이유, 우도를 가는 배편이 끊긴 이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게 함으로써 제주도가 내게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첫 번째 메시지는 생각보다 빠르게 나를 찾아왔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을 땐 곧이라도 비가 내릴 듯 흐렸다. 기내에서 흘러나온 안내 방송에서 제주도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고 했다. '한 손에는 우산, 한 손에는 캐리어 끌고 렌터카 픽업 장소까지 가느라 꽤나 고생하겠군' 생각하며 복도석에 앉아 여행에 대한 별 기대감 없이 책을 읽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 활주로를 떠나 상공으로 높이 떠오른 비행기가 어느 정도 고도에 도달하니 갑자기 주변에 환해졌다. 창가 쪽을 바라보니 낮게 깔린 구름 위로 천국처럼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고도 8,000km 위는 밝고 맑았다.
저 아래에서는 흐리고 비가 오는데, 바로 그 위는 이렇게 맑고 평안하다니.
갑자기 그 순간 깨달음이 들었다. 인생도 이런 것 아닐까. 살면서 가끔 비 오고 구름 끼는 날들이 있지만 결국 지나가는 거고 그보다 높은 위를 보면 그곳만큼은 맑다.
몸이 건강하고,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있고, 돈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있고,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는데. 가끔 힘들고 지치는 일이 있어도 본질적인 치원에서 이 정도 가졌으면 나의 삶은 충분히 맑고, 행복한 것이었다.
지치고 서글펐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성산일출봉 근처에 자리 잡은 취다선 리조트에 첫날 체크인을 했다. 머물면서 다도 체험을 즐길 수 있고, 힐링 요가와 명상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어 궂은 날씨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내 마음을 단 번에 달래준 최적의 숙소였다. 날씨는 내가 선택할 수 없었지만, 여행 첫날의 호텔만큼은 내 선택이 옳은 것 같았다.
둘째 날 아침 7시 30분에 명상 수업을 들었다. 비는 멎었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나무들이 거세게 흔들렸다. 서울 출신으로 이제 제주도에 정착한 지 10년 정도 되었다고 본인을 소개한 선생님은 서울에 있을 때는 사람 때문에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는데, 제주도에서는 자연 때문에 감정이 요동친다고 말씀하셨다.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불 때 극복하려고 애를 쓰면 오히려 더 어긋나요. 그냥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세요."
그 말이 내 마음을 톡 건드렸는지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인생이 마냥 화창할 수는 없다. 가끔은 축축히 젖고, 거센 바람에 흔들릴 수도 있는 거지.
날이 흐려서 아침인지 늦은 오후인지 분간도 안 가는 바깥이 우울하게만 보였는데, 명상을 마치고 나서보니 그렇게 차분하고 잔잔한 모습일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 두꺼운 구름이 드리웠던 마음이 이제야 조금 맑게 개기 시작한 것 같았다. 다 내려놓으니까 차라리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다. 비록 날은 흐려도 비가 내리지 않는 사실에 감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명상을 마치고 방에서 차를 마시며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바다의 표면은 잔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강하게 불기 때문에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몰려오고, 나무도 사람도 흔들린다.
도시에서 살다 보니 모든 것을 통제하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환경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당장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늦은 오후에 주문해도 그 다음날 아침 집 앞에 배달이 와 있고,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밖에 비가 오던, 날이 맑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제주도에 와서야 비가 오면 젖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기자기한 종달리 마을을 산책하다가 마주친 유채꽃 밭, 아기자기한 책방을 구경하면서 그냥 행복해져 버렸다.
어쩌면 이번 여행을 통해 제주도가 나한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바깥의 날씨와 상관없이 내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