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토요일 저녁, 내일 만나기로 약속이 된 친구로부터 갑자기 연락을 받았다. 어머니가 요리하시다가 엄지 손가락을 다치쳐서 급히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순간 나의 심장도 철렁했다.
오랜만에 경기도 본가에 올라온 딸(내 친구는 결혼한 뒤 대전에 살고 있다)과 가족을 위해 이것저것 급하게 요리하시다가 강판에 손가락을 다치셨다고 했다. 코로나 방역으로 인해 한 사람만 간병이 가능하여 아버지만 병원에 남아 계시고 동생이랑 둘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차분하게 상황을 전하던 친구의 목소리 너머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되고, 또 미안한 마음일까. 덩달아 마음이 먹먹해졌다.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놀라 슬픔에 잠겨 있는데 잊고 있었던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 때문에 잃을 뻔했던 우리 엄마는 왼쪽 약지 손가락.
우리 엄마는 자식 교육에 참 열정적인 분이셨다. 당신은 고졸이었지만 오빠와 나 만큼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시기를 바라면서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피아노, 미술, 수학 & 영어 과외 등 최선을 다해서 지원해주셨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남녀노소 피아노는 무조건 배우는 분위기가 있었다. 9살 때 바이엘을 떼고 막 체르니 100에 들어갔을 때 어린 나는 슬슬 권태기를 느끼고 있었다. 피아노만 덜렁 있는 독방에 들어가 연습을 하는 것이 지루하고, 실력도 늘지 않아 재미가 없어져서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다고 매번 때를 부렸다.
그때 엄마는 생각지도 못했던 '발레'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발레 학원에 가면 더 이상 피아노를 안 배워도 된다고 나를 꼬셨다. 지금은 남들 앞에서 마이크를 쥐고 진행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고, 오히려 그 무대에서의 긴장을 즐기는 나이지만 어렸을 때만 해도 남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던 아이였다. 웅변대회에 나가면 연습한 대로 우렁차게 웅변을 하다가도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다.
엄마는 내가 발레를 배우면 남들의 시선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덤으로 얼굴과 거의 몸통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나의 짧은 목을 길게 늘이고, 키가 쑥쑥 자라는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발레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냥 피아노 학원에 더 이상 안 가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엄마를 따라 발레 학원에 첫 발을 내디뎠다. 9살의 어린 눈에도 발레는 너무 우아하고 예뻤나 보다. 첫날 학원에 구경 갔던 날 이후 나는 홀린 듯이 발레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싫증 내지 않고 꽤나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2000년 당시의 발레 학원비가 약 15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물가로는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이지만, 원래 내던 피아노 학원비의 2-3배 정도였으니 그때 당시에는 꽤나 비싸게 느껴졌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삶을 살았던 우리 아빠는 비싼 돈 들여 발레 학원에 보낸다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셨다. 전업 주부였던 엄마는 아빠의 잔소리에 지쳤는지 눈치 안 보고 나를 발레 학원에 보내기 위해 집 근처 공장에 취직하셨다. 그때 엄마가 취업한 공장이 어떤 물건을 만드는지, 거기서 엄마는 무슨 일을 하는지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계속 발레 학원에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어느 날 저녁 집에 오빠랑 둘이 있는데 엄마가 공장에서 다쳐서 지금 병원에 입원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집으로 전화가 왔던 건지, 누가 우리 집을 찾아왔는지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 다쳤다는 소식에 너무 놀라 엉엉 울면서 병원에 갔다.
병실에 막 들어섰는데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온 사람들 무리에 둘러싸여 손가락에 가해진 고통과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놀란 표정으로 울고 있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달음에 달려가서 엄마에게 안기면서 울어야 했지만, 이상하게 그때의 나는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꺼렸다. 항상 보던 건강한 모습이 아닌 아픈 엄마의 모습이 낯설었고 무엇보다도 나 때문에 엄마가 이렇게 아프다는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던 것 같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어서 엄마는 왼쪽 약지 손가락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입원해있는 동안 약지뿐만 아니라 새끼, 중지 손가락까지 같이 붕대로 감은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서 그대로 뼈가 굳어버렸다. 그때 이후로 우리 엄마는 왼쪽 손가락 3개를 구부리지 못하시게 되었다.
씩씩한 우리 엄마는 그 후에도 계속 일을 하며 나와 오빠 교육을 뒷바라지하셨다. 물론 공장이 아닌, 더 안전한 곳에서. 대학생이 되어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나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엄마는 더 높은 월급을 주는 회사로 옮겼다.
사고가 난 날로부터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취미로 필라테스도 하고, 밸리 댄스 배우며 엄마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활동적으로 하셔서 정말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문득 굽혀지지 않는 엄마의 손가락이 보이면 마음이 짠해진다.
어떻게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가 없이 이런 희생이 가능한 걸까.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해서, 누군가의 엄마가 되겠지. 내 몸에는 어떤 흔적이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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