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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형 Jan 04. 2020

지금 스타트업에
이력서를 낼 거라면

이력서 200개를 보다 보니 현타가 오더라. 도대체 왜 이걸 안 쓰죠?


채용이 한창이다. 우리 본부만 해도 6개의 포지션이 열려 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수 십 개의 이력서가 쏟아진다. 이 전과 달라진 회사의 위상을 새삼스레 느낀다. 그런데, 이력서를 보다 보면 이전 스타트업에서 입시생들을 만나 잔소리를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제도 느꼈다. 대학 가는 자소서나, 회사 가는 이력서나 다를 게 없구나. 고등학생이나 어른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읽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구나.


(*오늘의 TMI : 문생원은 6년간 에듀테크 스타트업을 창업해 존버 한 경력이 있다. 문과생존원정대는 그 스타트업의 산물.)


스타트업(회사)은 바쁘다. 때론 채용절차 조차도 업무 부담이 된다. 그래서 이력서를 볼 때는 정말로 함께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만 면접을 보게 된다. 수백 개의 이력서를 보며, 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쉽게 가려내는 노하우가 생기더라. 방법은 간단하다. 이력서와 경력기술서에 '내 다음 행선지가 이곳이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하게 적힌 사람들의 이력서를 고르면 된다. 너무 당연한 거 아니냐고?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우리 회사에 오고 싶은 이유를 대기업 자소서 쓰듯 찬양하며 구구절절 '구걸'하라는 게 아니다. 그저 이유가 듣고 싶은 것이다. 수도 없이 많은 회사들 중에 왜 하필 우리 회사인지. 우리 회사를 어쩌다 알았고, 무엇에 관심이 있고,  그래서 우리가 면접 자리에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라도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없다. 채용 담당해본 사람들 다 알겠지만, 대부분은 이유 없이 경력기술이 전부다. 이런 이력서, 보통은 거르게 된다.


내 경우엔 특히 그 이유에 더 집착한다. 핀테크는 어렵다. 금융과 기술 어느 하나 쉬운 주제가 없는데, 두 개를 합쳤으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다니는 나조차 때론 힘들다. 그런데 재미있어 보이는 회사들을 다 제쳐두고, 다소 어려워 보이는 핀테크 스타트업에 이런 훌륭한 사람이 우리 회사를 선택한 이유. 아니 도대체 왜요?? 정말 너무 감사한데, 그거 진심인 건가요??? 저와 같이 금융을 박살 내 보실 건가요??? 그저, 그 이유와 진심이 궁금할 뿐인데,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그 이유가 없다. 


보통 선택의 이유가 명확했던 지원자들이 회사 생활도 오래 한다. 회사는 지원자들이 가진 기대, 선택의 이유에 대해서 면접 과정에서 모두 해소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채용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회사가 지원자를 '뽑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아니다. 회사가 지원자에게 정보를 주지 않고 '뽑아' 버리면, 회사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지원자도 회사를 고르고 재고 평가할 정보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정보를 주려면, 지원자가 어떤 기대와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 기대는 보통 회사를 선택한 이유에서 나온다. 그 이유가 없으니 정보를 줄 수 없고, 이는 곧 채용 실패로 이어진다.


이유는 무궁무진하다. '금융에 요즘 관심이 생겼다', '핀테크 어려워 보이는데, 나는 이런 난이도 높은 일을 좋아한다', '복지가 좋아 보여서 선택했다', '원래 모르던 회사였는데, 홈페이지의 글귀를 읽고 감동받았다', '대표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나는 멋진 대표가 있는 회사가 좋아서 선택했다.' 내가 들었던, 그리고 이 내용을 주제로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남은 이유들이다. 별 것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조차 없다. (한숨)


좀 더 잘 어필하고 싶다면? 간단하다. 이력서에 '회사에 내가 필요할 이유, 내가 이 회사가 필요한 이유'를 요약하면 된다. '너네 회사 보니까 요즘 이런 것 하던데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할 거야~'라는 문장을 보면 솔깃해진다. '내가 최근에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데 너네랑 같이 일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문장을 보면 동질감이 생긴다. 그 이유를 담은 한 두 문단의 글이 담기면, 면접의 대화 내용은 훨씬 더 풍부해지고 고퀄이 된다. 


만약 글을 못쓰겠으면, 이력서에 지원하는 회사 로고라도 달아보자. 채용이 절실한 스타트업 담당자들은, 그 정성에서부터 회사 선택의 이유를 읽어낼지도 모르니까.


새삼 나의 의심을 이겨내고 함께해주고 있는 동료들이 고맙다. 내가 말했잖아. 핀테크는 우리 같은 변태들을 위한 극악 난이도의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어려운 게 아니라 낯선 거라고. 하나둘씩 뽀개다 보면 금융을 주제로 선택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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