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의 예민함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는 '예민하다'는 다음과 같다.
1.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2.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
첫 번째 정의는 '능력, ' '뛰어나다'라는 단어 덕분에 긍정적으로 느껴지고, 두 번째 정의는 '지나치게, ' '날카롭다' 때문에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별로 안 예민한 것 같다고 말할 때는 아마 두 번째 정의로서의 예민함을 말하고 싶은 거겠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만 짓는다.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하다는 칭찬인지, 음악 하는 사람들은 예민하다는, 그러니까 지나치게 날카롭다는 편견을 갖고 한 말이니 그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건지. 이런 생각들에 매여 있다 보면 어느새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 또 타이밍을 놓친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피아노 전공생처럼 살았던 터라 학교 결석을 자주 했다. 학교 친구들보다는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피아노 친구들과 통하는 게 더 많았을 법도 한데, 나는 항상 그들이 불편했다. 우리들의 연주에 등수와 점수를 매겨 경쟁하도록 하는 시스템 때문이었을까, 선생님이 무심코 던졌던 그 친구의 연주와 나의 연주를 비교하는 그 말 때문이었을까, 어린 나이에도 느껴지던 엄마들 간의 신경전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세계에 살다 보면 안 예민해지는 것이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선생님은 매번 레슨 때마다 '연주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난다'라고 하시곤 했는데 이 말은 여드름이 많고 자신감이 없었던 사춘기 소녀로 하여금 자신의 성격을 싫어하고 나보다 잘 치는 그 친구의 성격을 부러워하게 만들었다. 무대에서 한순간의 실수로 몇 달간 연습한 게 다 무너진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무대 설 일이 다가오면 모든 감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좋은 의미로 한 말인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내가 별로 안 예민하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예민하게 곱씹는 엄청나게 예민한 성격이다. 내가 예민하지 않다고 누군가 느꼈다면 그저 나의 예민함을 누군가 느끼는 것이 싫어 잘 숨기는 법을 터득했을 뿐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으로서의 예민함은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자 강력한 무기다. 하도 오랫동안 내 예민함을 숨기고 숨기다 보니 혹시 이 능력까지 퇴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바라건대는 그 능력이 조금 덜 있어도 좋으니, 다른 이들에게 지나치게 날카로워지지 않기를.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하지만 무엇이든지 억압하고 감추면 언젠간 표출되는 법이니, 더 바라건대는, 나에게 음악이 예민함의 표출 수단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