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Fukuoka : 1st day
왕복항공권 10만원에 혹해 개강을 앞두고 급작스러운 후쿠오카행을 결정했다. 아침 7시 1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4시 30분 차를 학교 정문에서 탔다.
소요시간이 한시간 반이라고 해서 (새벽시간임을 감안해) 한시간 정도 걸릴거라 생각했었는데, 첫차임에도 정확히 1시간 40분 걸렸다.
면세품을 잔뜩 수령해야 했던 진산이가 옆에서 매우 초조해하며 T맵을 켰다 껐다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실제로 이렇게 촉박하게 도착하고, 체크인 라스트 콜이 불려서 따로 체크인 카운터로 불려나간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긴 했다.
물론 결국 탑승하고 잘 날아온 지금 생각하면 최대한 시간을 활용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후쿠오카까지의 실제 비행시간은 약 50분 정도였다. 몇 분 날아오지도 않았는데 곧 착륙할 예정이니 좌석을 세워달라는 방송을 들으니,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도시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출국장 바로 앞편에 있는 니시테츠 버스 센터에 가서 산큐패스를 개시하고, 예약해 둔 유후인 행 버스티켓을 교환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세븐일레븐에 가서 아침으로 에비마요 삼각김밥과 에그 샌드위치를 먹었다. (총 480엔)
차 한대 찾기 힘든 한적한 고속도로를 두어시간 달리면 후쿠오카 공항에서 유후인 역에 도착한다.
유후인 역의 대합실 옆 편에는 코인락커가 있어 처치곤란인 캐리어를 맡겨두기로 했고, (2개 들어가는 칸 500엔) 매표소 점원분께 자전거를 빌리는 것이 이번 여행의 시작이었다. 대여용 자전거에는 일체형 잠금장치가 달려 있어서 간단한 키 조작으로 가게 옆에 간편히 세워둘 수 있어서 참 편리했다. (일반 자전거는 1시간 당 250엔, 전기 자전거는 2시간 당 500엔)
처음 목적지는 하나노소바(花野そば). 유후인 중심가인 유노츠보 거리와 다소 떨어진 곳이어서 가는 길이 조금 헷갈렸지만, 그 덕에 일본의 (벼농사 짓는!) 시골 동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기분 좋아지는 길목들이었다. 딱 짱구에서 봤던 일본 농촌의 색감이 그대로라는 느낌이었다.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인지, 막 정오가 시작한 시간대라 그랬던건지 가게는 매우 한적했다. 한국인 손님도 없었고, (아마 여행 중 유일무이하게) 한국에 메뉴판이 없는 곳이었다. 물론 영어 메뉴판은 있었고 어느정도 영어로 주문도 받아주셨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우리는 무더웠던 날씨를 고려해 냉소바(자루소바)를 주문했다. (1080엔)
먼저 생와사비와 강판을 내어준 다음 (아마 식사 전에 미리 갈아 놓으라는 뜻이었던 것 같았다) 채반에 건진 면과 쯔유를 나중에 내어주셨다. 쯔유는 진한 것과 연한 것 두 종류로 나왔는데, 조금씩 덜어 와사비와 실파를 풀어 찍어먹는 전통적인 형태였다. 진한 종류는 면 전체에 찍기엔 굉장히 짠 감이 있어 끝부분만 살짝 담가 메밀의 심심한 맛도 살릴 필요가 있었다.
좋았던 점은 면의 굵기가 제각기라는 것. 공장제가 아니라 그날 가게에서 직접 뽑은 메밀면임을 마치 광고라도 하는 듯한 면발의 미묘한 굵기 차이가 재밌었고, 오히려 신뢰를 줬다. 정제된 연와사비와 달리 직접 뿌리를 갈아 넣는 생와사비는 훨씬 쏘는 맛이 덜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쯔유에 잘 어울렸다.
식사를 마칠 즈음 면을 삶은 면수를 가져다 주셨다. 처음엔 어떻게 먹는 건지 몰라 여쭈었더니, (대략 일본어로 설명해 주셨는데 대략 알아듣기로는) 남은 쯔유에 부어 마시는 것이었다. 내가 느끼기엔 다소 비려서 고소한 면수를 그냥 마시는게 훨씬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바집을 나서서는 긴린코(金鱗湖) 쪽으로 다시 자전거를 타고 움직였다. 구글맵을 보면서 움직였지만 좁은 길목이 많아 최단경로로 움직이는 효율따윈 없었고, 솔직히 바라는 바도 아니었다. 어느 길일지 모를 경로를 따라 대충 방향만 잡고 가도 호수는 근처에 있었다.
대단한 모습의 호수는 결코 아니었지만, 옆에 있는 나지막한 목재 정자와 벤치에 앉아 그늘에서 바람을 느끼는 건 무척이나 상쾌했다. 정오가 갓 지는 시간대라 뙤약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날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우리는 한참을 쉬다가 또 나지막한 주변의 비탈길을 자전거로 돌아보고는,
호수를 바로 앞에 두고 풍경 장사라도 하는 듯한 샤갈 카페에 들어가 비싼 커피를 마시고 목을 축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648엔) 여행 후반부에 돈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되서야 이날 마신 커피 가격이 되새겨졌다.
관광객이 붐비는 유노츠보 거리를 자전거로 돌아보기는 어렵다. 다시 역으로 돌아가 자전거를 반납하고, 걸어서 거리 구경을 다니기로 했다. 자전거 대여료는 시간 단위로 과금하는 방식이라, 열심히 페달을 밟아 가까스로 두시간 기준에 맞췄다. 원래 그런 돈이 제일 아까운 법이니까
다양한 기념품점과 주전부리 가게로 이루어진 상점가인 유노츠보 거리는 유후인 역에서부터 긴린코까지 이어지는 직선 경로상에 있다. 대부분의 상점들이 내부에서는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예약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비스포크(B-spoke)의 숏 사이즈 롤케익은 역시 매진이었다. 대신 금상고로케(金賞コロッケ) 집(언젠가 어딘가에서 열린 고로케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해서) 에서 바로 그 금상 고로케와 게 크림 고로케를 먹었다. 관광객이 굉장히 많아 고로케 집도 꽤나 기다려야 했다.
금상고로케는 소금 후추로 간한 매시드 포테이토였는데, 금상이라는 기대엔 영 미치지 못했다는게 공통된 느낌이었다. 게 크림 고로케가 느끼하긴 했지만 뜨거운 크림스프를 먹는듯 더 맛있었다. (총 310엔)
미르히(Milch) 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원래 치즈케이크나 푸딩이 더 유명한 모양이지만 더위를 식히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평범한 아이스크림 맛이었고, 좋은 우유를 사용했다는 걸 특장점으로 잡는 듯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폴바셋 아이스크림만 못했던 것 같다. (300엔)
기념품 가게를 돌아다니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토토로 관련 캐릭터 상품을 파는 돈구리노 모리(どんぐりの森)에서는 한참을 구경했는데 (공식 캐릭터 상품들이 보통 그렇듯이) 사악한 가격 탓에 구입하진 못했다. 그나마 천엔 남짓한 동전지갑을 살까 끝까지 망설였는데, 용산역 매장에도 똑같은걸 판다는 친구의 제보로 마음이 식었다. 그 밖에도 스누피나 키티 등 익숙한 캐릭터샵이 있었다.
캐릭터가 아닌 일본 느낌이 물씬 나는 장식소품을 파는 점포도 굉장히 다양했다. 벚꽃 문양으로 꾸며진 우산, 양산은 어느 가게에서나 한 두 코너씩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상품이었고, 유리나 나무공예로 만든 커틀러리, 풍경(風磬)도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여러군데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꽃 문양이 그려진 양산과 작은 파우치 하나씩을 선물로 샀다.
첫날의 숙소는 료칸. 사실 료칸에서 온천욕을 할 생각이 없었다면 짧은 2박 3일의 일정에서 유후인까지 오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애초에 료칸에 (처음으로) 가보자는 생각으로 놀러 온 것이었다.
분명 온천여행 비수기가 확실한 여름철 8월 말임에도 고급 료칸의 가격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수준이었고, 고르다가 고른 곳이 레이메이(ひすいの宿 黎明) 료칸. 2인 석식과 익일 조식을 포함해 약 22만원 가량이니, 입문자에겐 충분했고, 사실 우리같은 학생 신분엔 분에 넘치는 수준이기도 했다.
료칸이 유후인 중심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 유후인역에서 료칸까지 송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고, 우리는 간단한 음료와 간식거리를 역 앞쪽 마트에서 사서 료칸으로 이동했다.
체크인 시 석식 시간과 가족탕—대욕탕과 달리 그룹 단위로 탕 전체를 빌리는 형식—이용 시간을 미리 예약해야 했는데, 늦은 체크인 시간 탓인지 가족탕 이용이 프론트 업무 마감 이후 밤 늦은 시간대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양해를 들었다.
방은 상당히 깨끗하게 정리된 편이었다. 다다미 장판 특유의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그게 애시당초 료칸 다다미방을 빌린 목적이 아니겠나 하고 생각했다. 베란다(테라스가 아니라 베란다라서 아쉬웠음)로 나서면 창문으로 료칸의 한적한 마당과 숲, 유후 산(由布岳) 자락이 함께 눈에 들어와 감탄이 나왔다.
료칸에서는 온천욕 후 편하게 입고 돌아다닐 수 있는 유카타를 샤워로브 대신 제공했다. 당연히 유카타 같은건 평생 입어본 적이 없고, 허리끈을 어떻게 묶는게 정석인지도 몰라 적당히 골반에 묶어 입었다.
아쉬웠던 건 바디타올을 단 하나 제공하면서 여유분을 제공받으려면 추가로 이용료를 지불해야 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입문용 료칸이라지만 20만원이 넘는 숙소라면 수건이나 어메니티 정도는 여유롭게 제공하는 게 보통이지 않을까? 특히 온천이 딸린 숙소라면 적어도 두 세개는 줬으면 하는 바람이 심각하게 부당한 기대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어찌 되었든 땀을 흘려 상당히 찝찝한 상태였던 우리는 먼저 대욕탕에 가서 씻고 난 다음 저녁을 먹기로 했다. 대욕장은 샤워를 할 수 있는 실내 욕탕과,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실외 노천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실내는 한국의 목욕탕과 대단히 비슷한 구조라서 특별한 게 없었다. 샴푸와 린스, 바디워시가 마유(馬油)로 만들어져 굉장히 미끈미끈하다는 것 정도.
당연히 실외 노천탕이 하이라이트였다. 정말 자연스럽게 침출되는 온천수를 활용한 건 아니었지만, 주변 풍경과 충분히 어울리도록 만들어 둔 욕탕은 생각해온 것 만큼이나 운치가 있었다. 나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탕 쪽 노천탕의 재잘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신기했다.
물론 가장 신기하면서 기분 좋았던 건 밖에서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온천욕을 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경험 그 자체. 저녁 시간 즈음이어서 바깥 공기는 그리 뜨겁지 않았고, 하반신 반만 담가 신선한 공기와 함께 미끈거리는 온천수로 몸을 데우는 경험은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평소에 한국에서 대중목욕탕을 결코 가지 않는 성격임을 고려하면 더 그랬다.
... 물론 직접 찍은 사진은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고. 사실 대중탕임에도 시간대가 애매한 탓이었던지 이용객이 없이 우리끼리만 사용해서 호탕한 기분이었는데, 사진도 찍으려면 찍을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긴 한다.
저녁은 가이세키 요리로 별도 식당에서 준비해주는 형식이었다.
화로에 굽는 소고기, 어육과 버섯을 넣은 맑은 탕국, 냉우동, 회 몇점과 어패류 젓갈, 각종 절임류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밥은 자리에 앉은 후에야 따로 가져다 준다. 신 맛(시트러스향)을 음식에 과히 사용한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입에 맞지 않는 정도는 아니었고, 특히 탕국을 맛있게 먹었다. 오히려 소고기 구이는 평범한 편이었다.
해파리 냉채이자 애피타이저로 추측되는 이 음식만큼은 우리 둘 모두 도통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는 데 동의했다.
연잎으로 추측되는 것에 싸인 음식의 정체는 쫄깃한 떡이었다. 후식으로 먹었다.
사진으로 볼 때나 당시 눈으로 직접 볼 때나 양이 적어 뵈지만, 먹다보면 은근히 배가 차오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식사였다. 사실 숙소 예약을 고민할 당시 식사가 별로라는 평이 꽤 있었는데, 다른 료칸만큼 화려하게 대접받는 느낌은 물론 아니었지만 우린 충분히 만족했다. 어디까지나 가성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약해 둔 가족탕 이용시간이 되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객실에서 아까 사 두었던 음료를 자가비랑 먹으면서 쉬었다.
가족탕에 가기까지는 한참을 헤맸다. 예약 당시 상술한대로 프론트 업무가 마감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탕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던 탓이었다. 건물 안을 십수분동안 샅샅히 뒤지고 객실이 아닌 것 같은 곳은 죄다 돌아다녀 보았음에도 가족탕 입구가 도저히 보이질 않아서 포기하려던 찰나였는데, 아주 우연하게 료칸 건물 바깥에 불이 켜진 쪽문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까스로 가족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렵사리 찾아간 가족탕이었지만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건물 한켠에 붙은 테라스 한켠에 나무 욕탕을 하나 마련해 둔 형태였다. 밤 아홉시 쯤이어서 공기가 더 차갑게 식어 반신욕 하는 기분은 무척이나 신선했지만, 벌거벗고 2층 테라스에 서 있는다는 건 뭔가 엄청나게 민망한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일어서면 료칸의 주차장이 훤히 보이는 상태이기까지 해서... 절로 마음가짐이 조신해지는 두번째 목욕이었다.
객실로 돌아와서는 TV에서 해주는 일본 대 호주 경기를 보고, 또 핸드폰으로 한국 대 이란 월드컵 예선 경기를 찾아 보면서 무척이나 답답해하는 진산이와 그 날의 일정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