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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수 Nov 12. 2024

5. 나 때에는 말이야 2

(3) 집도 같은 방향인데 같이 갈까요?

(첫머리)

안타깝게도

인생이 놀이공원 자유이용권

같지는 않다는 걸 알아버렸다.


고등학생 때도 내가 원하는 과만 들어가면

적당히 성적에 맞춰 조절하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자유이용권처럼.


그때의 전교 1등과 재수를 선택한 친구들은

인생이 고민과 신중을 기해야 하는

Big3와 같다는 걸 이미 깨닫고 있었을까.


정해진 코스로 여행을 하는데,

앞으로도 재미없을게 뻔한 상황과

제주도에 왔지만 어디 갈지 몰라 검색만 해대며

시간을 허비하는 상황.

둘 중 무엇이 더 나쁜 상황인가.


사람에겐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재밌게도 Big3와 닮았다.


재미없는 상황은 엎을 수 있으며,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해야 했던

복잡다단한 순간의 선택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뷰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 대가로 3번의 기회 중 1번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케이스는 2가지.


롤러코스터를 타지도 못하는데

기회가 아까워 억지로 타는 경우,

폐장 때까지 아무런 선택도 못하는 경우.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괴롭긴 해도,

2번의 기회를 날려먹은 대가로

마지막 기회를 멋지게 선택취사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여행이 아닐까.


(본문)

새로 온 여자 선생님은

대학교 졸업 후, 정식으로 취업해서

처음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착하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첫눈 같은 사람이었다.


세상의 풍파나 큰 흔들림 없이,

인생을 살아온 듯 보였다.

요란하지 않지만, 눈에 띄는 한 마리의 백로 같았다.


나는 사회생활 초심자인 그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업무 프로세스와 전화받는 법까지 모두.


나는 참으로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바인더가 어디 있을까요?'라는 질문에는

"선생님 바로 뒤에 있는데요"라며 대꾸했다.


야근을 해서라도, 출근을 일찍 해서라도

회사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냐는

비아냥을 간접적 언어로 휘둘렀다.

말도 안 되는 횡포였다.

마치 외과의사에게 노동법을 왜 모르냐며

성질을 내는 꼴이었다.


'팩스는 어떻게 보내요?'라는 질문에는

"제가 보낼게요, 저 주세요."라며

인간미 없이 관계를 원천차단했다.


지금 나오는 로봇도

그것보다는 훨씬 친절했으리.

내가 로봇이었다면, 전량폐기를 면치 못했을 터이다.


친절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참 낯설었다.

나는 그게 잘 안되었다. 참으로 안되었다.


하지만 이건 마치, 짝사랑하는 이성에게 툴툴대는

초등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긴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긴장하는 탓에 많은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점심도 편하게 먹지 못해서,

늘 집에 가면 저녁으로 고봉밥을 먹기 일쑤였고,

회식자리에서도 난 늘 점잖게 굴었다.

'놀 땐 놀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챔피언'이라는

싸이의 외침에도 난 늘 귀를 반쯤 접고 다녔다.


늘 점심을 함께 먹던, 말수 많던 '토커' 선생님과의

오붓한 점심시간에 새로 온 여자선생님도 함께하게 되었다.


근처에 맛집은커녕, 식당도 많이 없던 동네라

선택권이 많이 없던 젊은 직원들은

늘 함께 어울려 다녔다.


나는 내심 좋았다.

늘 뿌리던 향수도 한 번을 더 뿌렸다.

향기는 나지만, 방향제 같은 사람.

순수하지 않은 그 무엇.

꾸며진 시간이지만, 아직도 그 향수에 취하면

그 시간이 소환되고는 한다.


잘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더 알고 싶어졌다는 것으로는 부족한 무엇.

왜, 아무 이유 없이 끌리는 사람이 있지 않나.

나에게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종종, 단 둘이 점심을 먹게 되는 상황이 있었다.

그럴 때 은연중에 무심한 척 개인신상에 대해 물어봤다.


'지금의 남자친구는 어떻게 만났어요?'

'대학교 전공은 왜 그걸 선택한 거예요?'


그녀는 늘 장난꾸러기 같이 웃는 얼굴과 리액션으로

주변 사람에게 늘 편안함을 주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말수가 적고, 남에게 관심이 없는 나에게도

'나 좀 재밌는 사람이구나?'라는 헛발질을 하게 만들 정도였다.

나는 그런 그녀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마음이 피-식 하고 식어버렸다.


나에게 '아는 여자', '아는 오빠'라는

영양가 없는 관계는 전혀 대입하고 싶지도, 되지도 않았다.


계산기처럼 타-다-닥 거리던 나는

나만의 계산을 끝내고, 최대한 힘을 빼고

그녀와 지내기로 했다.


어느 날, 긴 생머리를 똑 단발로 자르고 왔을 때도

나는 '머리 잘랐네요.' 한마디가 끝이었다.

지금 돌아간다면, '오~! 선생님! 머리카락 왜 떼고 왔어요~?' 하며

농담 섞인 한마디라도 했을 텐데.


이쁘장한 얼굴이 더욱 빛나보였다.

깜깜한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보기 위해

가로등의 전구를 깨부수어야 한다면,

자처할 만큼 그녀의 얼굴은 반짝이는 별이었다.


그 여자선생님은,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다.

정말 가까운 거리였다.

걸어서 20~30분 정도였기에,

차를 타고 이동하면 훨씬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늘 닿는 거리에 인상이 참 좋은 동료가 있다는 게,

내심 기분이 좋았고, 나를 기쁘게 출퇴근하게 하는

소중한 사실이었다. 터를 그쪽에 잡은 부모님께 감사할 만큼.


회사 일을 하다가 문득, 업무처리를 위해

그녀의 개인 계정을 공유받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OO 년 11월 후원내역입니다.'

이게 뭐지...?


'이번 달에도, OOO님의 후원으로 소중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그녀는 매달 소외받는 이웃들을 위한 후원을 하고 있었다.

2차 성징 이후, 가장 충격적인 일이었다.

몹시 충격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진정, 남을 위해 무얼 해본 적이 있던가?

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 남을 위한 것이었나?

절대적으로 아니었다.


내 시선에서는,

본인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일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청년이었다.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공감할 줄도 몰랐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직업상담을 선택했다니.

인생은 주관식이라지만, 너무 주관이 짙었다.


나는 그 메일함을 띄워놓고,

스크롤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내 눈을 깜빡여도 변하는 게 없으니,

그 짓이라도 해야 했다.


만약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더라면?

아마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선행은 내가 천국으로 가기 위한 티켓을

사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그 선생님은 주변에 전혀 떠벌리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생색을 내는 일 한 번 없었다.

나와 단 둘이 퇴근할 때도 많았는데,

난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또 하나 에피소드를 붙여서 얘기하자면,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같은 방향의

지하철을 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나는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까지

말 한마디를 걸지 않았다며,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는

타박 섞인 우스운 얘기도 전해 듣기도 했다.

필사적으로 츤데레 역할을 완수해냈구나 싶었다.


월급도 120-130만 원을 받던 시절에

교통비, 식비를 아끼기 바쁜데

남을 위해 후원을 한다는 것..

그런 가르침과 인성은 좋은 가정교육이 아니라면,

도저히 배울 곳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 명제가 참이라면, 역으로 나는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 셈이다.


정말 멋진 사람이구나.

정말 착한 사람이구나.

정말로. 정말로.


그 선생님과 함께 일을 한지도,

꽤 지났을 무렵, 연말 보고서 작성을 위해

12월 31일에 출근하는 일도 겪으며

나에게 아주 큰 찬스가 왔다.


늘 경쾌하던 그녀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

넝마주이 같은 내 마음속의 바람개비가 살랑살랑

기분 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선생님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퇴근 후,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요즘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나중에 동네에서 술이라도 한 잔 살게요.'

지금으로 치면 완전히 플러팅에 가깝다.

까일까 봐 내심 두렵기도 했지만, 나는 '좋아요~!'라는 답장에

온 세상의 이쁜 꽃들을 심어놓은 꽃밭에 홀로 뒹굴었다.


그렇게 힘든 직장생활의 하루하루를 그녀와 공유하고,

서로의 구석구석까지 알아가게 되었다.

집이 가까웠고, 또 술을 잘 못하는 나를 늘 데려다주던 그녀였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의 소녀 같던 그녀를 기억한다.

이제 그 소녀는 없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영영 살아 숨 쉬고 있다.



맞다.

결혼을 포기하고 선택한 새로운 길에는

그녀가 웃으며 서있었다.

그녀가 두 팔 벌리며 서있던 자리는 햇살이 쏟아지는 꽃밭 위였다.


흠뻑 젖은 옷으로, 어기적 걸어온 소년은

왜 우리는 이제야 만났냐며,

수줍은 소년은 가슴으로만 뚝뚝 울었다.


지금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녀, 그 여자 선생님은

지금의 나의 아내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바쳐도 바꾸지 못할 존재.

영원히 내 안에서 지울 수 없는 불멸자.


사랑은 완벽한 희극이다.

나조차도 나를 모르던 사람.

그녀의 따스함에 나는 완전히 물들었다.

나는 그녀의 사랑으로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를 모두 버릴 수 있었던 그녀의 존재에 감사하다.


나에게 그녀는

봄날의 햇살이고,

여름날의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 같았으며,

가을날의 닿을 수 없는 깊은 하늘 같았고,

겨울날의 추운 마음을 덥혀주는 붕어빵과 같았다.


이윽고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고,

또 오늘도 그녀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눈물겹게 감사하고 버거울 만큼 행복하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깨닫게 해 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최상, 최고의 선택.


아직도 어린 사람이라 사랑한다는 단어로 밖에

표현하지 못함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더 좋은 단어가 있다면 그대가 알려주길..


우리의 인생이 늘 따듯한 바닥처럼

서로에게 기분 좋은 존재이길,

그렇지 않다면 서로의 체온으로 늘 포근히 안아주길 바라본다.



- 인생 1막. 끝. -







지금까지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살펴봐주신,

많은 브런치 작가분들과 지극히 '나'로 살아가고 계신
많은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로 단단하게 흔들리는 작가로 세상 앞에 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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