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열정페이로 시작한 순결한 20대의 사회생활
(첫머리)
애석하게도 여러 번 폰을 바꾸는 바람에
과거의 사진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나중이 되면 나의 소중한 추억이 될테니, 꼭꼭 잘 보관하자'
라는 다짐을 꽤나 오랫동안 이어가던 중,
실물로 존재하지 않던 이미지에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찾아보지도 않는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모든 사진을 지워버렸다.
꼭 끌어안고 있는다고 없어지지 않을 과거도 아니었다.
색깔을 잃어버리고 기억력을 담당하는 측두엽의 평수를 차지할 뿐.
(본문)
나의 20대 초반,
23살까지의 기억은
'무식해서 정말 용감했다'로 정의할 수 있다.
별로 미래의 비전이나 내가 지속가능한 일인지, 계량하지 않았다.
아니, 몰라서 하지 못했는 것이 맞다.
20살, 부모님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기어코 대구가 아닌 타지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식음료를 공부했는데, 왜 많고 많은 전공 중에
굳이 식음료를 선택했냐면 정말 단순하고 웃긴 이유다.
그때 당시에 '떼루아'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게 마침 고3 수험시절에 방영을 했고, 난 그 화려한 브라운관 속 주인공을 동경했다.
뭐, 드라마의 흥행여부와는 관계없이
나의 글로리한 인생을 위해서는 '이거뿐이다'라는 반짝임을 좇아 그렇게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학비를 번답시고 새벽 2시까지 호프집 알바를 하느라
다음 날 오전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왜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지 않냐는 꾸중도 몇 번 들었다.
극현실주의 소탐대실(小貪大失)의 표본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참 열정이 많지만 실수투성이인 사람이었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소주잔을 깨서 손님 다리에 떨어진 적도 있었고,
더 최악은 '불맨'의 경험이었다.
불맨은, 숯불을 갈아주는 역할을 의미한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치 만질 수 있는 태양과 같은 절절 끓는 숯을 담은 통을 테이블 한 중간에 내려놓다가
너무 급하게 훅-! 들어가는 바람에
재가 고기에 우수수 떨어졌다.
그때의 나는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내 자리로 돌아갔고,
그 길로 '우리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웹드라마 대사처럼 가게에서 잘렸다.
사과도 대처도 참 미흡한
기능하지 못하는 법적 성인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런 퉁명스러운 기질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강의 중간에 끼--익 하고 열리는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갈 때,
뒤돌아보는 동기들의 시선을 즐기곤 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고,
100퍼센트 외재동기로 살아가는 나약한 친구였다.
(그나마 남들에게 피해를 안 입혔다는 점은 대견하다.)
현실에 적응을 잘 못하니, 나는 자연스레 조기취업에 대해 알게 되었고
조기취업계를 쓰고 1년 6개월의 전문대학 생활을 마치고 취업했다.
반전은 없었다. 전공은 살리지 않았다.
나는 영세한 어느 이벤트회사에 취업했다.
그때 당시에는 외향적(Extroversion)인 편이라,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상대하는 것이 즐거웠다.
어이없지만 단지 그 이유 하나였다.
이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스스로에게 얻었다.
어디서 본 것도 아닌데, 취업은 하고 싶으니
아무 경력도 없는 내가 미래에 이루고 싶은 것들을
쭈--욱 기재하여 구인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중요한 건 이 멘트였다.
그렇다. 나는 열정페이를 자처하고서 사회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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