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드리면 결국 열리더라
(첫머리)
우리는 모든 행동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다.
나는 아마도 이런 분야에서는 상위 10% 안에 들리라.
격정의 게으름,
게으름의 절정,
절정의 후회.
그렇게 우리의 게으르고 달콤한 시간을
절정까지 보내고 나서야 극치의 후회를 곱씹는다.
게으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게으름은 뇌에 각인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1차적 행위이다.
원한다고 해서 악몽을 꿀 수 있는 건 아니다.
1차 행위에 이은, 후회와 절망, 불안이 밀려온다.
큰 파도나 태풍에 신체를 가눌 수 없는 것처럼
이리저리 비틀대며 약진한다.
누군가는 엎드려서,
누군가는 한 발로,
누군가는 마차를 타고서.
많은 상황을 겪으며 알게 되었다.
속도는 결코 유지되지 않는다.
인생은 ‘크루즈모드’가 아니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려 액정이 박살이 난 날에도,
친구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날에도,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날에도,
나는 걸어야만 했다.
체력안배를 잘해서 걷자고 다짐했건만,
개뿔. 난 장거리 선수가 아니었다.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평생을 고민하며,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게으르게 미루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시간이 충분해서 그렇다는 것.
나에게만 맞는 처방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끝을 보고 마는 성격이기 때문일까.
좀 미루면 어때,
어쨌든 해내게 되어있다.
그렇게, 수많은 과거의 내 분신들이
현재의 나를 신뢰하며
미래의 나를 증명할 것이다.
게으름에 큰 의미를 두지 말 것.
그냥 시간이 조금 남았다는 얘기다.
(본문)
서울에 집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정말 많이 팔았더랬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당시에는
’신림=자취‘ 라는 공식 하나만 알고 있었다.
체감상 거의 50도 경사의 오르막길을
10분을 걸어야 하는 언덕 위의 원룸.
탯줄 같이 필연이었던
곰팡이냄새로 가득한 반지하 원룸.
지하철에서 2분 거리지만
영혼을 뺏기는 것 같은 사악한 월세의 원룸.
그저 1+1=2 라는 것만 알았던
단순한 나였기에,
월세를 아껴보고자
힘들지만 언덕에 있는 원룸으로
선택하고, 어머니에게 전화로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는 말씀했다.
‘혹시 계약금을 줬더라도 물러라. 직장에 집을 맞춰라.’
고집불통에 청개구리인 나였지만,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
직장과 원룸의 거리는 뛰어서 1분.
사회생활 도입부 자취방의 시작이었다.
어머니 말을 듣길 잘했다고 느낀 건,
출근한 날 당일에 바로 증명됐다.
비록 화장실에 사람 1명 이상 절대 들어갈 수 없고,
1500에 44+@라는 비싼 금액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처음 취업한 회사는
기업 파티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서울에는 원체 기업체가 많으니,
관련된 회사나 연계서비스가 잘되어있었다.
생존과는 동떨어진 악어와 악어새 같았다.
말하면 누구나 아는
큰 대기업의 창립기념일 행사부터
청년들을 위한 토크콘서트,
유명강사를 초청한 강연행사 등등
지방에서는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마치 콘텐츠 속에 잠긴 기분이었다.
온 세상이 무지개빛으로 발광했다.
난 미친 듯 일했고, 즐겼다.
그리고 일을 잘한다고 인정까지 받았다.
나의 생각은 달랐다.
너무 몰랐기에 다를 수 밖에.
그치만, 기획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에서 향유한다.
너무나도 행복하게 유영한다.
이 사실을 지금은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내가 서울에서 근무한 첫 회사는
나를 포함해 6명이 전부였고,
1명은 그마저도 사이드잡을 하는 분이었다.
콘텐츠의 숲에서
적은 인원이 많은 열매를 따야 했고,
나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매일매일 직장동료들과 퇴근 후 생맥을 즐겼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근무 중간중간에 빌딩 옥상에 올라가서 피는 담배도,
야근하며 컵라면과 별을 야식으로 한 날에도,
내 눈은 항상 반짝거렸다.
주말이 오면, 월요일이 기다려질 만큼
일하는 게 재밌었고 동료들을 사랑했다.
아이러니하지만 당시 드라마 미생을 보며 많이 울었다.
잘 흘러가나 싶을 무렵,
끓는 피가 증발했다.
클라이언트와 우리 대표와의 접점이
맞춰지질 않자, 프로젝트 담당이었던
나는 일을 순항하게 만들자는 이유로
대표를 건너뛰고 커뮤니케이션을 했고,
그 과정을 대표가 알게 되어 난 책임을 묻게 되었다.
사유서를 적어야 했고,
난 3개월의 수습기간을 끝내고
일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땐, 이게 내 사과의 방식이었다.
잘못을 잘함으로 덮어야 하는데,
도망으로 바로잡으려 했다.
당시 대표는 날 붙잡거나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그렇게 하자.’라고 했고,
난 남은 근무기간을 줄담배로 연명했다.
뼈가 아릴 만큼 몹시 추운 날,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손을 빼면 더 추울 것 같아서.
우매함을 센 척으로 이겨내보려 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고,
나 또한 답을 찾을 수 없던 날들.
그렇게 난 다른 회사를 알아보게 되었다.
평소 대표가 관심 있게 지켜보던
회사가 문득 떠올랐다.
하루이틀... 정도 채용공고를 기다렸다.
‘T.O 기우제’를 지냈다.
기적처럼 바라던 티오가 날 리가 있나.
고민은 결과를 늦출 뿐이었다.
난 회사대표 메일로 보낼 포트폴리오 작업에 매진했다.
첫 번째 지원. 하루이틀.. 일주일이 지났다.
답장조차 없는 이메일에 나는 절망했다.
하지만 이겨내야 했다.
전 직장 대표에게 보여주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난 입사를 성공해야만 했다.
그렇게 두 번째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다시 똑같은 회사에 재차 지원했다.
메일 내용은 절실함으로 빵빵했고,
‘커피라도 한잔 얻어마시고 싶습니다!’
라는 멘트로 재차 두들겼다.
T.O가 있는지 없는지 그건 중요치 않았다.
내가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중요할 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릴없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혹시나 내가 지원한 회사는 아닐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아--음음!!
‘네, 전화받았습니다.’
’oo회사입니다. 지원자 ooo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하나만 질문할게요. 입사하신다면 저희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3가지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
...
......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렇게 내가 간절히 두드리던 문을
열어젖히고 원하던 회사에 합격할 수 있었다.
면접 당시 대표는 물었다.
‘대표실에 있는 그림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시죠?‘
온갖 고초를 겪을 내가,
그 그림 속에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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