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수 Sep 29. 2024

4. 나에게 꼭 맞는 신발 찾기

(1) 13개의 직업들 중 하나를 고르자

(첫머리)

심장을 물레에 돌린다.

맥박이 찌그러졌다가 펴졌다가를 반복한다.

섬세히 펴보고 싶어 순간의 긴장이 감돈다.

그러면 그렇지, 또 쪼그라든다.


그렇게 난 오늘도 내 심장을

물레에 올려 빚는다.


쉬지도 않고 일한 손을 묶어 정형을 멈춘다.

비정형이 선사하는 완벽함에 그저 경탄한다.

불완전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서늘한 공기가 내 손끝을 스친다.

기분 좋은 소름 끼침.


비가 와서 홍제천 강이 많이 불었다.

한강의 계단이 물에 잠겼다.


한 달 전 걸었던 시멘트바닥이 물이 됐다.

물 위를 걸었다고 상상하니 아찔해진다.


사람들은 모처럼 시원해진 날씨에 조깅을 하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한강라면을 사먹거나,

놀이터에서 버스킹을 즐기기도 한다.


비록, 서울로 올라오는 기회비용으로

7,500만 원이라는 돈이 불가피하게 사라졌지만,

서울의 가을은 나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계절을 보여줬다.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지개를 펴는 가을 귀뚜라미.


이번 가을은 나에게 3,000만 원 어치의

감동을 주었다.

어쩌면 와이프의 선물일지도.

마음에 남은 나만의 빚의 중량은 -4,500 으로 줄었다.


서울의 가을은 행복하다.

많은 일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정말 그랬다.


(본문)

나는 꽤나 유교적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그 집 산출물은 그렇지 못했다.


대학생 때, 발표대에 서서

‘저는 꽤나 보수적인 집에서 컸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일동 폭소했다.


스탠드업 코미디도 아니고,

이 반응들은 뭐지?


남이 보는 나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얽매이지 않았고, 거칠 것이 없었다.

소위 말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빵빵했던 내 자아는 건포도처럼 쪼그라들었다.

원래 건포도였지만,

잠시 기대를 머금고 부풀었다가

되돌아온 것일지도.


살아있음에 도달하는 여정.


나에게 있어 결혼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교사상의 뿌리는 무척 억셌다.

자녀는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살아있음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


첫 번째로 선택한 직업은

‘기계공학 기술자’였다.


전.화.기

전기, 화학, 기계.

우리나라 취업 깡패 3대장.

단순했다.

‘기술을 배우면 평생을 먹고산다‘ 는

어르신들의 말이 조금은 와닿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려면

최소 세전 월 500만 원은 벌어야

주말에 동물원도 가고, 외식도 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 믿었다. 그리 상상했다.

정확하게 산출하기는 어려웠다.

막연한 행복에 몽롱한 생각을 뻗었다.


그럼에도 기계로 먹고살 자신은 쉽게 깨졌다.

흐르는 피가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

Done.


두 번째는 가구제작.

디자인에 늘 관심이 있었기에,

이것이야말로 탁월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친구 3명이 동업해서 큰 가구브랜드를

만들었다는 책을 사서 읽기도 했다.

직업학교에 찾아가 수업을 지켜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척 과정이 고된 직업이었다.

목공방에서 최소 7년은 배워야 할 듯했다.

그 길로 창업하더라도 잘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세 번째, 용접공.

과거 인터넷 강의를 진행하던 강사가,

‘이 문제 틀리면, 공부하지 말고 용접해.’

라는 말로 대한민국을 왈칵 뒤집었다.

화이트칼라가 환대받던 시대 분위기였던 건 맞지만,

직업의 귀천을 자신만의 시야에서 정하고 가뒀다.


그렇다. 기술직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고되다.

‘내 아들 고생하는 거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가 어딨노’

부모님의 바람이 0.1이라도 반영됐다면,

난 덜 고생했을까.


이제는 친구지만 군대에서 만났던 후임도

진로를 고민하다가, 마침 특수용접을 배운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이거다 싶었다.

해외를 가도 용접기술만 있으면

먹고살 일은 걱정이 없을 듯하였다.


근데, 이것도 자신이 없었다.

손재주가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Clear.


네 번째는 타일공.

해가 바뀔수록 타일 기술자들의 고령화가 가속되어,

기술을 배울 젊은 사람들이 없으니

굉장히 유망한 직업이라고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접했다.

더 좋은 건,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타일기술은

생계에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근데, 이게 너무너무 쉽지 않았다.

반나절만 하고도 도망간단다.

오기가 생겼지만, 진짜 오기임을 알았기에

깔끔하게 또 포기.


제과제빵, 커튼사업, 조경기능사, 전기기술자,

특수차 운전.. 모두 나에게 맞는 일은 아니었다.


글을 쓰는 지금은 짧게 슥-슥하고 넘어가지만,

한 선택에 거의 90~99.9% 이상은 마음을 먹었고,

최소 3일에서 길게는 보름까지

직업조사를 내리 하였다.


마치 긴급수배범을 잡는 것 마냥

밤낮을 지새는 꼬리잡기를 했다.

내 진로를 찾는 일은 그만큼 치열했다.


잊기 어려운 순간들.

불안을 겹겹이 얹어, 이 시간을

건물로 만들었다면 고층빌딩 건물주가 되었을지도.


정말 크게 마음먹었던 직업은

‘자동차 디테일링‘이었다.

쉽게 풀어보면,

자동차 세차와 복원 전문이었다.


우선, 꼼꼼한 성격인 나에게 맞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창업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먼 미래가 되어서도 자동차라는 재산은

부와 과시의 척도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디테일링 기술은 대구에선 배우기는 힘들었다.

KTX로 2시간 거리인 대전에는

관련된 커리큘럼이 2개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벌써 짐을 싸고 있었다.

99.9퍼센트 마음을 먹었다.

고생한 하루를 마치고

바닥에 읏-차 하고 눕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럼에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안될 이유를 막 가져다 붙였다.

그래도 나만의 고유한 성향과 신념을

꽤 많이 충족시켜 주는 일이었다.

문제는, 너무 많은 디테일링 샵이 있었다.

과연 내가 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아랫배가 아릴만큼 열심히 뛰어왔지만

오아시스는 신기루였다.

신기루를 오아시스로 만든 것도 나였다.

모든걸 자포자기하고 싶은 순간.


안된다. 그래도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되돌아보니 크게 잃을 것도 없는 삶이었다.

날뛰는 분노를 가둘 목책을 세워야 했다.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다.

‘저는 이러한 상황이고, 돈을 내도 좋으니 직업상담을 받고 싶습니다. 도와주실 분은 쪽지 주세요!‘


몇 시간 뒤,

내 인생을 바꾼 사람이 멀리서 날 찾아왔다.

경기도에 살고, 여자분이었다.

자신은 현재 직업상담사를 공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장장 한 시간 가량을 통화했다.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신 것 같은데, 직업상담사를 해보시는건 어떠세요?’


나도 그 직업을 알고 있었다.

공시생 당시, 교정직 특채에 ‘직업상담’ 직렬이 있었다.

눈을 한창 낮추던 때에, 그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심리학을 배워보고 싶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어느 순간 그 바람이 내게 스며든 것 같다.


심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지독한 고민악귀가 붙은 사람들을 위한

퇴마의식을 거행하고 싶었다.

답이 나왔다. 100.0%.


근데 해결해야 될 것이 있었다.

이 직업은 무척이나 박봉이었다.

사회복지 직종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사회복지 직종이 박봉인 것에 불만이다)


나는 결혼을 꿈꿨고, 이쁜 자녀가 있어야 했다.

세전 월 500이 필요했다.


순간 나의 세상은 엄청나게 증폭되고 확장했다.


나는 연애도 안 하고 있고,

결혼을 할지도 안 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고민하고 있지?

혼자 살면 월 150만 원을 벌어도

먹고 살 수 있지 않나?


대학생들에게 진로 강의를 하며

종종 이 치열한 여정을 압축해서 전달했다.


“여러분은 무엇 무엇을 해야만 한다 라는 불합리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나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세상에 거칠 것 하나 없었다.

내가 꿈꾸는 대로 그려가는 세상.

The answer to life's biggest question.

추운 겨울이었지만, 나의 삶에는 봄꽃이 피었다.


공포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고민은 때를 기다린 성난 파도처럼

본격적으로 나를 집어삼키고 뱉었다.

그나마 물 위에 떠있을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큰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최종 선택을 가족에게 중계했다.

그렇게 난 기쁘게 직업상담사의 길을 선택했다.


Next Episode ------ (2) 공부는 행복할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