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수 Dec 19. 2017

와인도 음악도 없는 프로포즈

가을, 아이슬란드에서




내가 계획하던 프로포즈의 시놉에 분위기 좋은 호텔이나 촛불, 멋있거나 맛있는 음식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일단 아이슬란드에서 조명이 예쁜 고급 호텔은 너무 비싸서 갈 수가 없다. 아이슬란드에서 멋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하루치 경비를 한 끼 레스토랑에 써야 한다. 다니다 보니 맛있는 음식은 배고플 때 허겁지겁 먹는 핫도그나 피쉬앤칩스.


여행이 반 정도 지나니 점점 초조해졌다. 

아무리 이곳저곳과 모든 시간이 고백할 타이밍이라지만 이러다가 진짜로 빙하로 만든 손가락에 반지를 줘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명색의 프로포즈인데 거창하진 않아도 조금은 극적이길 바랬다. 

여긴 아이슬란드니까.




Landmannalaugar (란드만날라우가르)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큰 의미를 두고 벼르던 일정이 있다. 하이랜드 지역으로 들어가야만 갈 수 있는 란드만날라우가르(Landmannalaugar) 산에서의 트레킹과 캠핑.


아이슬란드 내륙지방의 고지대 중앙고원을 '하이랜드'라고 부르는데, 하이랜드는 사륜구동만 진입이 가능하며 비포장 F로드를 거쳐야 한다. 여러 번 얕고 깊은 강을 건너야 했고 울퉁불퉁하다는 표현이 초라할 만큼 험준한 길로 산과 산 사이를 넘어야 했다. 란드만을 가기 위한 F26번 도로는 특히 더 드라마틱했다.

환상적이었다. 

황량함, 고요함, 아름다움, 거침, 그리고 공포.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 곳.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미래가 이보다 더 험난할 테지만 우리 결혼해보자!'


무서운 곳에서 차마 결혼하자고 할 순 없지.

이렇게 험한 곳을 지나 존재하는 그곳은 더 극적이어야만 한다.






F26


Q1. 빙하와 구름의 경계를 구분하시오



Q2. 산봉우리와 구름의 경계를 구분하시오




산 넘고 물 건너면 왜 또 산이야..





달빛과 쌍라이트에 의존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를 마지막 강을 건넜다. 시꺼먼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야 란드만날라우가르 캠핑 베이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밤 텐트 위로 또다시 선물 같은 오로라가 떴다.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추운 밤이었다.

결혼하자 말하기엔 너무 쌀쌀맞은 밤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라면으로 때울지도 몰라, 근데 나랑 결혼할래?'

아무리 오로라가 뜨셨다 한들 신라면에 물 부어 먹으면서 결혼할래, 물어볼 순 없었다.




텐트 안에서 라면먹던 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낯선 밤이 끝나고 꿈꾸던 트레킹 루트에 올랐다.

나는 산길에 오른 지 15분 만에 양털 조끼 주머니에 있던 반지를 꺼내 왼손가락에 꼈다. 이대로 15분을 더 가면, 30분을 더 가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을 가리키는 푯말이 중간에서 끊겼을 때 여긴 아닐 거야 싶은 깎아지른 오름길이 나왔다. 발 한 짝만 디뎌 올라갈 수 있는 턱의 나열. 


프로포즈 하러 가는 길이 이렇게나 험할 줄이야.

산장지기 아주머니는 출발 전 가죽자켓에 배낭 하나 매고 루트를 묻는 용감한 아시안 커플에게 흔히들 가는 코스이며 어메이징한 뷰를 만날 거란 말 대신 가파른 산 하나를 펜스도 뭣도 없이 수직으로 타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셨어야만 했다. 반지 대신 호루라기나 신호탄 같은 조난도구를 챙겨갈 수 있도록.






Landmannalugar 트레킹 코스 그린루트 중



돌아갈 순 없으니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계속 올랐다. 분명 끝까지 왔는데 어딜 봐도 내려가는 길이 없었다. 길 뿐만이 아니다. 처음 루트에 오를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이라곤 없었다. 뻥 뚫린 산 중턱엔 바람과 구름과 우리만 있었다. 이렇게 환하고 파란 낮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걸으면서 이만큼이나 마음 졸였던 적은 처음이다. 푸르고 바람 짙은 가을이었다.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멋있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그대로 낭떠러지 끝에 나란히 앉았다. 분명 똑같이 겁났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꾹 다문 채 일어서는 그를 잡아앉혔다. 의아한 시선을 무시하고 왼쪽 장갑을 벗었다. 여기가 아니면, 이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그의 눈앞으로 왼손을 들어 보였다. 







우리.. 결혼하자? 



이게 뭐야?

말빨 좋은 나는 정말 이상하게 말을 더듬었다. 특별한 멘트 따윈 당연히 잊었고, 아련한 눈빛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눈꺼풀만 겨우 뜨고 있었다. 아무런 치장도 장식도 곁들임도 없었다.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극적이긴 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은 곳에서 했으니까.


그때 뒤에서 누군가 카메라로 우리를 찍었다. 커플 방울모자를 쓰고 마주 보고 앉은 뒷모습이 꽤나 귀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셔터소리 뒤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

'이게 뭐야 @#$@%&%*(...' 어쩌구저쩌구 였던 것 같은데 사실 이 앞뒤로 많은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가 많이 고마워하고 많이 행복해했다는 정도. 그 순간에는 바람도 제대로 못 느꼈다는 정도.


어림잡아 골랐던 싸구려 반지는 아니나 다를까 너무 작았고, 그걸 굳이 손에 끼고 내려가겠다는 그는 얼어서 부어있는 약지를 쑤셨다. 우리는 손을 잡고 일어났다. 분명 조금 전까지 내려가는 방향이 가늠조차 안되었는데 일어서서 한 바퀴 돌아보니 저 멀리 작은 길이 보였다. 

무섭던 꼭대기가 한결 낮아진 듯 한 건 기분 탓이었을까. 

기분 좋은 하산이었다.





나는 결국 해버렸다.

와인, 음악, 조명 하나 없는 프로포즈를.

우리는 아이슬란드 내륙 한가운데에 있는 어느 산 꼭대기에서 매서운 칼바람을 증인 삼아 결혼을 약속했다.



'Will you marry me?' 스팟 뷰포인트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우리 사이를 잠시나마 스친 두려움은 앞으로 우리가 함께 가야 할 모든 시간에 맞설 용기를 줄 것 같았다. 

어디든 어떻게든 못가리? 싶었다.


한 번쯤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끝없는 오르막길이, 막다른 절벽이, 열두번은 더 맞서야 할 칼바람이

두렵지만, 결코 두렵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Photography is taken by Jisoo / Instagram @soologue




우리가 결혼을 한다면,

우리가 결혼을 하고 잠시나마 힘겨운 시간이 찾아온다면,

이 날의 기억을 그때 다시 꺼내보기로 다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슬란드는 모든 순간이 고백할 타이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