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실리콘 밸리니까
그래픽 소프트웨어 공룡 어도비의 피그마 인수가 화제다. 엄청난 금액의 인수가도 놀랍지만, 구매자가 어도비란 사실에 디자이너들은 많은 충격을 받았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등 디자이너들의 필수 소프트웨어로 오랜 기간 Love & Hate을 받았던 어도비는 왜 작은 회사를 엄청난 가격에 인수했을까. 나는 그 이유에 UX 디자인 그리고 그것을 받치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제품 개발 문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인수에 대한 몇 가지 개인적인 경험과 인사이트를 공유해 본다.
- 한때 매주 새로운 디자인/프로토 타입 툴이 선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대략 2011년에서 2016년 사이로 에자일 시스템으로 불리는 실리콘밸리에서 자주 사용하는, 빠르게 개발해서 테스트해보는 제품 개발 프로세스가 많은 스타텁들을 양산해내고 성공 신화를 만들어 나갈 때다. 당시 UX 디자인은 어도비의 포토샵 혹은 일러스트레이터로 주로 작업이 되었고, 애프터 이펙트 등으로 동적인 영상을 만들어 사용자 동선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UX 디자인을 위해 만든 툴이 아니고, 사진을 보정하거나 동영상 편집을 위해 만들어진 툴인만큼 느리고, 무겁고 진입장벽이 높았다.
- 이틈을 파고들고 UX 디자인에 최적화된 스케치를 비롯한 디자인/프로토 타입 툴들이 대거 개발되었다. 특히 스케치는 UX 디자이너들에게 선물과 같았다. 가볍고 안정적이며, 사용자 동선을 그리고 테스트하는 데에 최적화된 이 소프트웨어는 단숨에 실리콘밸리의 대부분 회사들이 표준 툴로 지정할 정도로 빠르게 시장을 장악해 나아갔다. 하지만 스케치는 완벽하지 않았다. 툴 자체는 가볍고 목적에 최적화되었는데 팀원간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은 여전히 또 다른 툴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 그때쯤 클라우드 베이스로 디자인하는 피그마가 소개되었다. 한 가지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공유하면, 피그마가 나오자마자 베타 유저로 (아마 나는 첫 한국인 사용자가 아니었을까) 사용할 기회가 있었는데 몇 가지 이유로 당시에는 사용하지 않기로 결론 내었었다. 첫 번째는 클라우드 서비스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출시되지 않은 제품의 시안, 고민의 흔적들이 처음 들어보는 스타텁의 서버에 저장되는 것에 대한 불신이었다. (같은 이유로 보안을 중시하는 회사들은 아직도 피그마를 쓰지 않는다.) 두 번째, 기술적인 부분으로, 베타 당시에는 딜레이가 느껴질 정도로 실시간 기능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팀 동료와 테스트 삼아 와이어 프레임도 그려보고, (실시간 툴임을 테스트해볼 겸) 장난스럽게 사선을 쓱쓱 그려 Reversi 게임을 하기도 하였는데, 얼마 후 둘 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스케치로 돌아갔다. 커서의 움직임이 느려서 실시간으로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기에 메인 디자인 툴로의 대체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구세주였던 스케치는 점점 어도비 소프트웨어화 되어 갔다. 로딩 속도가 늦어졌고, 비이상적으로 저장 공간을 차지하기도 하였으며, 자주 멈추기 시작했다. 윈도용 버전 출시도 늦어졌다. 다른 팀과 공유를 위해서는 여전히 다른 툴을 써야 했다.
- 어느덧 피그마의 실시간 연동 속도는 사용할 때 무리가 없는 수준이 되었고, 웹으로 구동되는 너무나 쉬운 사용성은 같이 일하는 다른 팀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예를 들어 포토샵은 켜본 적도 없는 엔지니어라던가, 스케치마저 다운로드하고 들여다보기 어려운 마케팅 팀원들 조차, 피그마는 배울 필요 없이 바로 디자이너들과 협업할 수 있는 툴이었다. 모든 팀원이 함께 브레인스토밍을 할 수 있는 Figjam이나 커뮤니티 기능들을 차례로 출시하며 그 활용성 역시 확장했다.
- 함께 디자인 한다는 컨셉은 실리콘밸리의 제품 개발법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팀원이 모두 브레인 스토밍을 하고, 디자이너가 디자인하면, 컨텐츠 디자이너가 문구를 살피고, 프로토 타입을 통해 빠르게 테스트 해보면서, 엔지니어가 사용자 동선을 따라 개발을 진행하는, 틈없이 흘러야 하는 디자인-제품 개발 과정이 피그마 하나로 해결될 수 있었다.
- 피그마의 주요 업데이트는 실리콘밸리의 다른 서비스 론칭처럼 하나의 파티 같았다. 피그마는 주기적으로 적절히 필요할만한 기능을 업데이트했고, 그때마다 디자이너들은 열광했다. 수시간 기다려 다운로드 후 김 빠지는 업데이트 내용을 확인해야 하는 어도비의 그것과 달랐다. 피그마는 그렇게 급속도로 호감도를 높여갔다.
- 모든 디자이너는 사실 어도비에게 빚이 있다. 어도비의 포토샵 혹은 일러스트레이터는 디자인을 배우는 학생이 구입하기는 너무나 비싼 소프트웨어였고 공유받은 복사 시디와 시리얼 번호로 그것을 배우는 것은 부끄럽지만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서 컴퓨터 사양을 당시 최고로 맞춰야만 원활히 사용할 수 있는, 최적화에 대한 아쉬움 이라던가, 가능성이 무궁했던 플래시를 인수 후 방치하다 사라지게 한다거나, 업데이트되는 건 버그나 사용성 개선이 아닌 과금 시스템일 뿐이라던가라는 식으로 Hate 마크를 쌓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이너들의 필수 소프트웨어는 그렇게 미움을 받아왔다. 스케치, 피그마를 차례로 쓰면서 탈 어도비 한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 디자이너들이 많았다.
- 오랜만에 등장한, 디자이너와 실리콘밸리가 사랑한 소프트웨어가, 사랑했지만 미워하는 거대 기업에 인수되었다는 사실에 많은 디자이너들이 복잡한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피그마는 피그마대로 당분간 좋은 툴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실리콘 밸리는 곧 또 다른 피그마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것이 실리콘 밸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