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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20. 2019

왜 회사에선 성취감을 원하면 안 되나요

휴직일기(11) 나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학교와 회사의 차이점 중 하나

학교는 일단 과제를 제출하고 나면 좋든 싫든 특정 성적을 받은 뒤 일단락되지만

회사는 제출한 과제가 통과되지 못하면 몇 번이고 다시 해야한다는 점이다


특히나 내가 선택한 직업은 클라이언트가 만족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기에 다시, 다시, 다시, 다시를 반복해야 하는 일이 특히나 잦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 방식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 특히나 개복치 멘탈을 가진 내게는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 회사에 입사해버리고 말았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되는 환경, 일단 결과물이 나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댓가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환경에만 길들여져 있었기에 일할 때마다 스트레스가 컸다



그냥 '일하는 방식'이나 '환경'으로 퉁 쳐버리기엔 나는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1) 결과물이 보고 단계를 거치며 계속 변함

2) 수정 요청이 계속 오면 그들이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무능하게 느껴짐

3) 이런 과정이 지속되니 클라이언트에게 제안을 할 때마다 두렵고 겁이 남

4) 심한 경우엔 '어차피 다시 할 텐데 뭐'라는 생각에 일할 의지가 생기지 않음

5)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내 것 같지가 않음

6) 그 결과 일이 끝나면 한없이 허무하기만 함




나는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생각하는 과정이 즐겁다

아이디어가 뿅! 나왔을 때의 알 수 없는 쾌감, 그리고 그걸 맘에 드는 글로 표현했을 때의 기쁨

회의에 들고 간 아이디어가 채택되었을 때의 안도와 기분 좋음, 그리고 결과물에 대한 기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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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여기까지가 내가 하는 일에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감정인데

위에 적어둔 1~6까지의 경우를 거치면 이 감정들이 엄청난 크기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바뀐다

자아효능감 마이너스, 성취감 마이너스, 허무 허탈 가끔은 분노 폭발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만큼 그 생각이 멋진 결과물로 나오길 바라는 사람이라서

나는 일이 그렇게 흘러갈 수 없는 이 구조가 너무 힘들고 싫다


내가 예술가가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일을 대행해주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이상 이 문제의 해결책은 내가 이런 업의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팀장님도 '뭐 하나 만든다고 대단한 기쁨이 드는 걸 기대하긴 힘들다'고 몇 번이고 말해주셨다

그냥 보고 하나 잘 넘기고, 결과물이 결국 나오면 나왔구나 하고 그 사실을 좋아하며 넘어가야 되는 거라면서



이 분야에서 20년 넘게 일한 선배들, 나보다 글을 몇 배는 더 잘 쓰고 생각을 몇 배는 더 잘할 그 선배들도

열심히 생각해서 만든 결과물이 하루 아침에 뒤집어지는 걸 아직도 겪으며 일하고 있는데

그깟 일 몇 년 해봤다는 내가 뭐 대단한 작품이라도 쓰는 양 스트레스 받고 상처받는 게 솔직히 우습기도 하다



그치만 여전히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 나는 내 머릿속에서 시작된 생각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지,

어째서 그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지,

나는 내가, 우리가 함께 만든 무언가를 보며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데..

이 생각이 나를 불안으로, 분노로, 괴로움으로 떠미는 바보 같은 생각인 걸까


정말 나는 '성취감을 얻고 싶다는 생각', 이 감옥에 갇혀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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