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봐도 해피엔딩이 아니라 알고보면 해피엔딩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단 한 가지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일 것이라고 꽤 자신 있게 대답해본다.
건강과 화목함, 돈과 명예 등 우리가 흔히 원하는 가치는 사실 ‘행복’이란 상위 가치에 종속되는 하위 개념이 아닐까.
다시 말해 행복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과 수단 들일뿐이지 우리가 이러한 구체적인 매개채들을 통해 사실 얻고자 하는 궁극의 가치는 결국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이토록 거창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보편적인 가치라 할 수 있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돈과 명예를 얻어내는 역량은 현저히 낮을뿐더러 건강과 화목함을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외부의 변수가 작용해 내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생존력과 적응력만큼은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는 나인만큼,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결국 나름의 해답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쉬이 획득한 방법은 바로 행복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 눈을 끊임없이 길러내기만 한다면, 나는 이 세상이 말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실낱같은 단초를 얻었다고나 할까.
한번 쇼핑에 비유해볼까.
옷가게에 들러 옷을 살 때, 우리는 보통 큰 그림만 가지게 된다.
특정 브랜드나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만을 고집한다면 만족하기 어려운 쇼핑을 하기 쉽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 없이 옷을 사야한다는 그 필요에 집중해 현미경 같은 눈을 갖게 된다면 조금 다른 시선으로 쇼핑을 즐길 수 있다.
이 옷은 씨줄과 날줄이 얼마나 고르게 교차되어 있는지, 실 하나하나가 이루는 색감과 질감이 얼마나 고유의 것을 지키고 있는지, 그 실들이 이루고 있는 패턴과 무늬가 얼마나 정교한지 등 마이크로 사이징의 눈으로 옷을 바라본다.
그러면, 처음 딱 봤을 땐 내 맘에 썩 들지 않았던 옷도 저마다의 예쁨과 개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예산과 현실에 맞춰 처음 생각과는 다른 형태의 옷을 사게 되어도 불평하지 않게 된다. 아니 꽤나 만족하게 된다.
누군가 내게 말한다.
젊은이가 지니기엔 너무나도 안일하고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대단한 행복만 바라보다가 삶에 치인 우울한 영혼에게 그렇다면 무엇을 제안할 것인가.
계속 나아가고 애쓰다 보면 언젠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계속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삶을 권유할 텐가?
아니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요소를 찾아내 그것을 징검다리 삼아 끊임없이 기존의 나를 깨부수고 도전하며 사는 삶을 제시할 것인가?
둘 모두 행복에 이르는 방법으로 통하겠지만, 후자의 삶을 두고 나태한 삶이라 쉽게 비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내 자신에게 투과했던 기존의 신념과 사회의 세뇌를 한 겹 한 겹 벗어젖히고,
나의 사유와 통찰을 통해 내린 진정한 행복이란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 한 조각 한 조각 행복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모아가는 삶이 쉬워 보이는가?
나는 후자의 삶이야말로 기존의 틀을 버리는 아주 혁명적이면서도 치열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데미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해 알을 깨는 중이다.
모든 것들이 실패한 지금. 내가 여전히 행복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세상이 내내 말했던 것보다 행복은 훨씬 자세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소확행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행복이 지천에 널려 있다는 뜻이다.
나는 요새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발견한 내 행복을 나누고자 이렇게 글을 남긴다.
지금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렇게 글을 남길 수 있는 것 조차도 나는 지대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해지기란 사실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고 예상보다 심히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쉬운 산수 문제를 두고 굳이 어려운 공식을 쓸 필요가 있을까. 행복은 생각보다 난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