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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Feb 25. 2021

꿈은 없고요, 여행만 다니고 싶네요.

헤아릴 수 없이 잠을 설친 밤들

누군가 내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만일 퇴사를 하게 된다면 무엇을 가장 해보고 싶냐 묻는다면 대답해주는 것은 인지상정, ‘여행’이라며 외칠 자신만큼은 차고 넘친다. 오랜 바람은 돈 없는 백수라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도 같으니 아주 조금은 현실적인 ‘1년 일하고 여행 가기가 내 주된 바람이 되었는지도  오래되었을 것이다. 아주 현실성은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현실적이라기엔 괴리감 따위가 있는 탓에 그저 조그마한 희망 정도만으로 생각해오고 있었던 그해,


나는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하고 싶었던 것을 제쳐두기만 했던 내 나이 스물여섯. 늦었지만 1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 도전은 내 삶에 있어  큰 도전이었기 때문에 조금의 터닝포인트가 있어야 했다. 돈도 있겠다, 시간도 남겠다. 그 여행길이란 곳에 한번 올라가 보려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매일 밤을 뒤척여야만 했다. 그도 그럴것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며 혼자 오르는 여행길의  A to Z를 내가 다 계획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혼자 중얼거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숙소는 어쩌지?” 겁도 많은데 혼자 자야 된다니 이건 뭐, 도전을 뛰어넘어 모험이었다. 게다가 내성적인 성격은 또 어떤가? 먼저 식당에 가 앉아 있으라는 말에 민망해 그냥 가게 밖에서 멀뚱히 서 있는데 밥은 또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말 그대로 멘붕의 연속이었다.


점점 여행 날짜는 다가오는데 뭐 하나 제대로 된 계획 없이 무료한 나날들이 지나갔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날, 퇴근 전 지도를 뽑아 놓고 집으로 달려와 쭉 훑어보았다.

한 지역에 마음을 두어 출발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모든 곳을 샅샅이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여유가 넘쳐나는 재산은 아니라 몇 군데만 돌더라도, 이왕 여행길 한국 한 바퀴는 한번 돌아보자 생각하니, 차츰 눈에 계획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광주를 기점으로 차츰 올라가 전주, 수원 그리고 서울을 찍어 곧장 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대장정(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을 계획했다.


여행은 모름지기 테마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목적이 없는 여행은 힘을 잃는다.

무료한 일상 속에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한국사’였다. 우연히 한국사를 다룬 모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어머나! 그게 또 얼마나 재미있던지! 어렸을 때부터 항상 재미난 무언가가 하나라도 생기면 속절없이 빠져버리는 성격 탓에 재미로만 그치면 될 한국사를 아주 딥하게 들어가 시험까지 치러 버렸다. ‘공부가 이렇게도 재미있다니!’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아직 존재하는 문화재들도 많은데 한번 가볼 만하지 않나 라는 생각까지 닿았다. 태생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에 찰떡으로 부합하는 여행 테마가 아닌가 싶었다.

누군가의 간섭 없이 오롯이 천천히 산책하듯 걸어 다닐 기회가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걷다가 길을 잃어도 좋겠다. 정말 그러면 패닉일 테고.


내게 ‘여행을 떠난다’라는 것은 그것도 ‘나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내 삶에 있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선택지였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닌 이상은 두려움이 가장 먼저 앞섰고, 나조차도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기’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도 그 여행이 옳은 선택지인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 하나를 위해 무엇을 한 번도 해보지 않는다면 내 인생이 정말로 안타까울 것 같았다. 그것이 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궁금해할 것이다. 굳이 혼자가 아니어도 되는 여행길에 왜 혼자 떠났냐고 묻는다면, 그의 대답은 나만을 위한 ‘것’의 충분조건은 내가 나와 대화를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나라는 의문이 떠오를 테고,  그 여행길이라는 것이 나와 나의 대화점을 이어 줄 여행이라면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해답이지 않겠냐는 답변을 내놓을 수 있겠다. 아마 그 답변이 충분조건에 부합할 테지.


어쩌면 이 시기에 이런 생각이 들어 실천에 옮긴 것은 아마, 마음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던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는 것이 퇴사라는 일을 앞두고 수면 위로 떠올라 내 눈앞에 보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누군가를 위해 가는 여행이 아니니, 어떻게 계획을 하든 좋았다. ‘왜 이렇게 바꿔대!’라며 짜증을 내는 동행자도 없고, ‘이게 가능한 계획이야?’라며 의문을 제기할 동행자도 물론 없으니, 몇 번이고 수정을 해도 좋고 다시 간다. 번복을 해도 좋은 일이었다. 아마 그 책임은 내가 져야 할 테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주 좋았다.


일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불쑥 떠올라 그 설렘이 주체가 되지 않을 무렵 나는 퇴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여행을 갈 것이다.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무척이나 떨렸으며, 마치 사춘기 소녀 마음이 널 뛰듯, 널까지 뛰는 감정들이 오갔다. 그런데도 출발하는 날 하늘은 정말로 파랗고, 구름 한 점 없었으며 그날 들었던 노래들은 무척이나 내 마음에 쏙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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