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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Mar 05. 2021

1. 유유자적한 그 날의 햇살 또한

환벽당

2월의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꽁꽁 얼어붙는 한파 덕에 봄이 아닌 한겨울을 맛보는 느낌이었다.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는 길에 어쩐지 조급해져 조마조마한 마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문득 든 의구심 하나. 내가 과연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이 작은 핸드폰 하나만 믿어도 괜찮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정류장 앞에 다다랐다.


시간 맞춰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 숙소 근처 정류장으로 향하던 도중 앞에 앉아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창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내가 앉은 자리 한 쪽에 불어와 뺨을 간지럽혔다. 시선을 들어 열린 창문 밖을 바라보니 추운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파란 하늘 아래 낯선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내가 살던 곳 같으면서도 그곳이 아닌 곳. 두 근 또다시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나 정말 여행 왔구나."


비로소 실감이 나서 괜스레 눈시울이 다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도착하는 동안 열린 창문으로 자주 눈이 가 닿았다. '여행 기분 적금'이라는 것이 만일 있다면 그땐 아마 약간의 두려움 두스푼과 설렘 세 숟가락 정도 자동이체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직 체크인하기엔 많이 이른 시기. 떠나오기 전 짐을 미리 맡겨주겠다는 친절한 호스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짐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혼자 우물쭈물하던 내게 다가와 물었다.


"혼자 여행하시나 봐요! 어디 여행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혹여나 빠른 길을 알고 있나 싶은 마음에 냉큼 대답했다. "환벽당에 가보려고요!" 내 대답에 모르겠다는 눈치길래 문화재라며 뒤이어 대답하자 더 모르겠다는 표정에 그저 허허 웃고만 있었다. 그러길 잠깐, 친절한 호스트는 원효사라는 곳을 안다며 시간이 남으면 그곳에도 가보라며 추천을 해주었다. 참 다정한 분이었다. 타지에서 온 낯선 게스트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나눈 대화가 따뜻해 목적지로 출발하는 길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버스에 내려 눈앞에 두고 조금 헤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출발했을 때 시린 날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햇빛만이 쨍쨍 비추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으니 새가 조용히 지저귄다. 물 흘러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산책하듯 걸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 마주한 정자 하나. 길게 늘어져 있는 담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이 정자는 환벽당이라고 불리는데, 조선 시대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명종 시절 나주 목사를 지낸 김윤제라는 사람이 노년에 후학 양성을 목적으로 지었던 정자라고 하는데 선조 시절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작품을 남긴 문호 송강 정철과도 연관이 깊다. 김윤제가 낮잠을 자다 낚시터 앞에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신묘한 꿈이라 생각이 들어 급하게 낚시터에 내려가 보니 미역을 감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돼 외손녀를 이 소년에게 시집보냈는데 바로 이 소년이 송강 정철이었다고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얼굴이 어떻게 비범했는지 정말 궁금할 지경이다.


이곳 환벽당에서 김윤제는 술잔을 들고 시를 읊는 일상을 보냈다고도 전해지는데 그런 기세답게 마을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는 정자였다. 정자로 올라가는 계단이 꽤 층이 높아서 한 발자국씩 조심히 올라야 했다. 아직 이른 시간 너무 부산스럽게 움직인 탓일까 멀리서 강아지 한 마리가 우렁차게 짖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눈앞에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환벽(環壁)이라는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른 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룬 곳이라는 데 조용히 공감해본다.


계단을 타고 정자 한가운데 서서 다시 풍경을 바라보니 아직 겨울, 잎이 없는 앙상한 가지들이 보였지만 그 가지들조차 진한 초록색의 잎사귀가 자라난 듯 착각이 일었고, 그 착각의 시야엔 여름날. 초록의 풍성한 나무들 사이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 그들은 시인 묵객들이겠다.


듬성듬성 난 나무들도 좋다며 시문을 쓰고, 서화를 그렸을 것이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며 경치에 취해 있다가 주변이 검푸른 색을 띠는 밤이 돼갈 때쯤 어디선가 가져온 술병을 꺼내어 들고 어슴푸레 떠도 좋을 달을 안주 삼아, 낮 동안 정신없이 쓴 시문 혹은 서화도 좋지. 그것들을 벗 삼아 한 잔 들이켜겠다. 한 잔, 두 잔, 그렇게 들이켜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오는 줄도 몰라 다시 붓을 들곤 또다시 정신없이 써 내려갈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빈 술병만이 나뒹굴 때, 앉은자리에서 까무룩 잠이 들어 아침을 맞겠지. 떠날 때쯤 아쉬운 마음에 조금 그곳을 더 서성이다가 또 이곳과 같은 비슷한 곳으로 찾아다닐 것이다. 그것이 시인 묵객들의 업이 아니겠는가.


연기의 기운인지 구름까지 겸했는지
거문고 소리인지 물소리가 섞이었는지
석양 무렵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니
모래 길에 대밭 가마 소리쳐 우네


이 시는 환벽당의 흥겨움을 표현 한 시다. 안개와 구름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신기하게도 거문고 소리와 물소리는 같이 들리는 와중에 술을 마시다 말고 취객은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전형적인 시인 묵객들 같지 않은가. 아마 김윤제 또한 같은 마음으로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는 노옹의 유유자적함에 취해 "거, 나도 한 잔 주쇼!"라며 살갑게 다가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혀가 고꾸라져도 좋을듯하다. 경치에 취해 잠을 청해도 좋을 만한 이곳은 새들도 오가는 객들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지저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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