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리미학 Mar 06. 2021

2. 태생적으로 서둘러 다닙니다.

무등산 증심사

중학생 시절 학교 현장 체험학습으로 등산을 한 적이 있다.

까마득한 기억 속의 중학생 소녀는 학교에서 정해준 집합장소인 한라산 윗세오름까지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가뿐히 올라가 그 지점에 있는 매점에서 맛볼 수 있는 사발면을 먹었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이번 여행길은 유독 걷는 코스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는 곳마다 산과 가까이에 있거나, 도시에 있다 하더라도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버스로는 갈 수가 없는 거리이기도 했다.


서두름의 축복일까

아직 해 밝은 낮, 어두워지기엔 시간이 좀 남았다. 버스에 내려 무등산 등산 초입 입구 쪽으로 다다랐다. 등산복을 잘 차려입은 등산객들이 속속히 보였다. 그 가운데 청바지와 항공 점퍼만을 차려입은 내 모습은 어쩐지 그곳과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등산으로 온 '객'이 아닌 것을.


아직 봄이 오지 않은 늦겨울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느라 숨은 쉴 새 없이 헐떡인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운동량은 현저히 부족했고 겨우내 땀방울이 이마 사이로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가는 객들을 위해 산은 단단히 다듬어진 아스팔트 바닥을 내어주었고 그 위를 하나둘, 지나는 그들의 표정은 어쩐지 비장하기까지 해 나조차 비장한 표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해봐야 얼마 안 되는 거리기는 하지만)


높다란 나무들이 서로를 에워싸듯, 하늘을 가리는 나무들은 객들을 위해 비나, 혹여 내리는 눈을 맞지 말라며 지붕을 내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제주엔 5.16 도로라고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도로가 하나 있다. 그중에서도 아는 사람들만 아는 '숲 터널'이 하나 있는데, 계절마다 나무의 색이 형형색색으로 바뀌어 한 철 지날 때마다 드라이브하듯 그곳을 방문할 때면 마치 처음 와본 듯한 착각을 주는 곳이다. 걷는 동안 그 도로와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하며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낯선 곳에서 주는 익숙함은 언제든 마주해도 좋다.


증심사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정신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귓가에 흥겨운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기 시작하는데 이 소리가 말 그대로 '졸졸'거리는 소리라 귀를 의심케 만든다. 문득 어디서 들려오는가 싶어 길 가장자리로 가보니 조그마한 시냇물이 얼어있던 냇가 얼음을 깨고 아주 작게 졸졸 흐르고 있었다. 아마 그 얼음은 아직 놀고 싶어 하는 시냇물들에 못 이겨 조그맣게라도 물꼬를 터준거겠지. 그 사이로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시냇물들은 무얼 이야기하느라 저리도 기분 좋게 소란스러울까.


그렇게 다다른 증심사.

광주의 대표적인 사찰로도 불리는 이곳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이 절경을 이룬다. 그 가운데 무심히 자리를 지켜왔을 사찰 증심사, 마음을 '증득'한다는 뜻에 증심사, 조선 시대에는 마음을 '맑히다'라는 뜻을 지닌 증심사 혹은 징 심사라고도 불렸다지만 지금은 증심사로 고정해 부른다고 한다. 두 가지 뜻 모두 좋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에 자리 잡은 사찰도 좋지만 역시 내겐 자연에 둘러싸인 곳이 주는 분위기가 훨씬 더 마음 언저리에 와닿는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시냇물들의 조잘거림도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소란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잎사귀 없는 나무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간간히 객들과 스님이 오가는 발소리만 들려온다. 


이곳에 템플스테이가 진행된다는 정보는 이 여행을 끝낸 뒤 다음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을 무렵 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갔을 땐 한두 명의 사람들만 가끔 보여 템플스테이를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새해가 되면 정기적으로 가는 사찰 하나가 있다. 높다랗게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석탑과 석상을 보며 어른들은 두 손을 모아 조용히 합장하고선 들어섰다. 어렸을 땐 멋모르고 어른들을 따라 합장하는 시늉 정도로만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이가 들기 시작하니 저절로 합장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입구엔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사천왕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해야지만 비로소 증심사에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가는 길에 조용히 합장하고선 들어갔다. 사박사박 흙을 밟는 발소리만 들려온다. 승려 도윤이라는 사람이 처음 이곳을 세웠지만 애석하게도 일련의 사건들로 하여금 보수가 잦았다는 이곳은 조선 시대 세종 시절 전라도 관찰사 '김방'이라는 사람이 본인의 녹봉(이하 월급)으로 낡아 버린 이 사찰의 건물을 다시 고쳐 지었다는 점이 인상에 깊었다. 그저 마음으로만 연유를 찾아 묻는다. 아마 그가 가진 이유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유였겠다.


겨우내 흘린 땀방울로 인해 조금 더워진 나는 겹겹이 쌓인 겉옷을 한 차례 벗어놓고 가만히 자리 한구석을 차지해서 대웅전을 향해 조용히 바라본다. 흐트러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게 그렇게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무엇하나 순탄히 흘러가지 않았던 직장생활과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힘들어했을 나 자신을 찾아 조금이나마 위로해본다. 누구의 의지도, 간섭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고, 또 정리해본다.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이 차츰 잦아질 때쯤 바람이 나붓하게 불어왔다. 그 바람도 어쩌면, 어지러운 내 마음이 잘 정리될 수 있게 찾아와 준 바람이 아니었을까. 오래 맞아도 춥지 않은 바람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말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이내 겉옷을 다시 주워 입고 계단을 내려가 다시 사천왕문을 지나쳤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오래는 있을 수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달래고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가는 길목에 작은 시냇물들의 조잘거림이 다시 들려왔다.

배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작게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작가의 이전글 1. 유유자적한 그 날의 햇살 또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