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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Mar 12. 2021

3. 별이 총총한 이 밤, 나 홀로.

원당산 공원

내비게이션이 말썽이었다.

밤은 깊어만 가고 이대로라면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정말 내가 길치였나 싶은 마음에 조급해져 갔다. 다시 숨을 가다듬고 길 가장자리에 서서 지도 앱을 켜고 자판을 꾹꾹 눌러 검색해본다.


'원당산 공원'


처음 증심사를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와 여유롭게 남은 하루를 정리하고자 했지만, 못내 마음이 아쉬웠나 보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라는 책에는 주인공 남, 녀가 낙산공원으로 산책하러 가는 내용이 있다. 낙산공원으로 가려면 성곽길을 타고 올라가야 했는데 성곽길 길목에서 남자와 여자는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문득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바람을 타고 숲 냄새가 번진 탓이었을까 그녀는 성곽길 길목에 서서 남자에게 고백한다. 사랑한다고.

낙산공원이 아닌 성곽길에서의 장면 묘사임에도 불구하고 인상 깊었던 그 소설의 대목은 어쩐지 오랫동안 '낙산공원'을 떠올리게 했다. 특정한 공원이 아닌 그저 동네 뒷산이 주는 정겨움이라 더욱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없는 곳이 주는 환상 때문일까.


인터넷으로 찾아보다 어쩌다 발견하게 된 이곳.

야경이 아름답다는 글에 혹했을 수도 있다. 야경이 주는 황홀함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다. 야경은 늘 내게 많은 영감을 주곤 했다. 그렇기에 야경을 동경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주변에 밭과 바다가 전부였으니, 아마 남모르게 야경을 흠모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불빛이 내뿜는 그 기세를 좋아했으며 그 이면을 몰랐었기에 더욱 사랑했을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이면을 알기란 쉬웠다. 그렇다고 흠모하고 있던 야경이 지겹다거나 혹은 싫어졌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야경이 주는 황홀함을 오롯이 가지고 있으며, 생각이 많을 때면 늘 밤의 빛을 찾아다니러 간다. 그 불빛은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내 주변은 고요해진다.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도, 사람들의 흥성거림도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으며 그저 고요한 바람만 불어온다. 그 사이에서 나는 나에 대한 무수한 키워드를 떠올린다. 딱히 무엇을 결정짓는다거나, 무엇을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좋은 분위기와 시간이 어쩐지 지금 떠올리면 조금은 마음 아프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늘 그것들이 주는 느낌이 난 좋았다.


한 시간을 넘게 헤매 온 이곳은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숨어있었다.

아마 내가 초행길이라 꼭꼭 숨어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찾았다는 환희와 비로소 야경을 볼 수 있다는 안도감에 야트막한 숨을 내쉬고 괜히 비장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도, 조용히 발 주변을 비추어주는 가로등도 어둡지 않게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아 괜스레 고마워진다.


그러나 역시, 절망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오는 법.

전망대가 운영하지 않았다. 이 공원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한 '전망대'의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한창 들뜬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애써 찾아간 곳에서 이런 사소한 문제를 마주할 줄이야. 문 앞을 서성거리며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린다. 마감 시간 두 시간 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굳게 닫혀 있는 입구를 보며 괜히 투덜댄다. '에라이! 어쩔 수 없지!' 하며 주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노래 한 곡을 듣고 내려가기로 생각했다.


드라마 엔젤아이즈 오프닝 곡 'Angel Eyes'.


이어폰을 귀에 꽃아 소리를 최대로 높인다. 음색과 분위기 등에 맞는 여러 언어를 골라 부른 곡. 이 곡이 주는 분위기가 좋았다. 아무런 가사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흥얼거릴 수 있는 곡, 그렇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듣기에 좋은 곡이었다. 이어폰에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나갈 때쯤 서서히 일어나 내려가려던 찰나 눈 앞에 펼쳐진 도시의 무수한 빛들이 내게 우수수 쏟아져 내려왔다. 조용히 들려오는 차 소리, 자는 사람 깨울까 착하게도 조용히 짖는 강아지 소리, 바람에 나부끼는 잎사귀 소리마저 조화를 이룬 듯 완벽한 공간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와도 좋을 공간이지만, 난 아직도 그곳을 떠올리면 '혼자'였을 때의 느낌이 더 강렬하게 남아있다.


오늘 하루 오롯이 내 시간 안에서, 나만을 위한 길을 찾아 나섰고 누구의 방해도, 간섭도 없었던 하루였다. 그렇기에 더 소중한 시간이었나 보다. 내려가는 길, 돌계단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야경을 바라보았다. 노래가 끝이 난 줄도 모르고.


직장생활을 하며 힘들었을 때도 있었고, 좋았었을 때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쉬지 않고 내달려온 내가 괜스레 애잔하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좋았든 싫었든 그 경험들은 내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며 나를 또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별들이 빛나는 밤 수놓아진 야경을 바라보며, 가만히 내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수고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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