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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Mar 13. 2021

4. 어쩌면 애잔한 멜랑꼴리

펭귄 마을

그날 그 방의 손님은 나 혼자였다.

혹시나 새벽녘 늦은 손님이 방문하지 않을까 싶어 핸드폰 알람을 최대한 작게 설정해두고 눈을 감았다. 하루의 피로함이 밀려온다거나 설렘으로 잠이 들지 않는다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저, 안도감으로 켜켜이 쌓인 하루의 끝자락 내일의 여행일랑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무수히 떠오르는 생각 또한 떠오르는 대로 놔둔 채 그렇게 잠이 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꾸지 않았거나 좋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떠 몸을 일으켜 작게 달린 침대 커튼을 걷어내 보니, 역시나 느지막이 온 게스트는 없었다. 괜히 긴장했나 싶어 그냥 웃고 말았다. 천천히 준비해도 체크아웃 시간은 아직 여유로웠다. 다음 숙소로 옮겨갈 짐을 차근차근 챙기기 시작했다. 아침 공기는 아직도 뺨이 아릴 만큼 시렸지만 그만큼 햇빛 또한 서서히 비추고 있어서 그런지 그것으로나마 위안을 삼았다.

펭귄 마을의 펭귄 가족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동네에는 굽이굽이 골목길이 늘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 작은 골목에도 촘촘히 집이 서로 이웃해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이웃집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골목이 떠나갈 정도로의 소란을 피우며 밤이건 낮이건 지치지도 않은지 뛰어놀던 게 어쩐지 생각난다. 아무 걱정 없이 그저 즐겁기만 한 내 어린 시절 고향은 이곳과 참 많이 닮아있었다. 광주 양림동에 있는 이 골목의 이름은 이름마저 귀여운 '펭귄 마을'이다. 거주민 대부분이 어르신들이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걷는 모습이 뒤뚱뒤뚱, 펭귄과도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 골목 이름만큼이나 정감 있는 이곳 주민들. 이 골목을 닮은 주민들이 난 참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여느 지역에 가면 볼 수 있는 벽화마을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골목을 가득 메운 자작시와 주민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정크아트가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을 둔다. 골목길 초입 어느 한 할아버지가 조용히 집 앞 작은 의자에 앉아계셨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아 뺨이 아려 추운, 아침 공기를 맞으러 온 것일까. 감기가 들지 않을까 조심스레 걱정하며 입구로 들어서니 내게 눈빛으로 작게나마 인사를 해주신다. 그 따스함에 추위도 잊은 채 나 또한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친절한 할아버지는 그곳에 자리해, 오는 손님을 마다하지 않으며 따스하게 인사를 건네주시겠지.


골목을 조금 걷다 보면 정면에 방명록 하나가 보인다.

눈치 볼 것도 없는데 조심스레 방명록 한 장, 한 장을 펴 본다. 여러 사람이 다녀간 흔적과 그 사람들을 꼭 닮은 필체를 보며 종이를 걷어내자 드디어 흰 백지가 보였다. 볼펜을 들어, 내 이름 석 자를 적어보고는 어쩐지 민망해져 빠르게 옆으로 비켜나갔다. 그렇게 이른 아침도 아니었는데 객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사방이 조용해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진다. 골목 한 귀퉁이에서 작게 쓰인 수많은 검은색의 글자를 발견하고 궁금해져 그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온통 글자로 메워진 벽이 즐비해 있었다. 펭귄 마을을 닮은 자작시, 창작의 혼을 담아낸 인생의 시들. 각양각색의 필체로 쓰인 이 시들의 주인은 본인의 이름 대신 '이 집 담벼락 주인 딸내미'라며 필명을 내비친다.


아마 벽에 시를 쓸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는 A4용지, 혹은 쓰다 남은 공책들을 한 아름 모아 무슨 '시'를 써볼까 하며 머리를 꽁꽁 싸맸을 시인들. 처음 써보는 '시'라는 것이 너무 낯설어 한동안 쳐다보지 않다가 다시 들여다보다가, 내가 봤던 좋은 글들은 모두 어디에다 저장해둔 거지라며 한 번씩 핸드폰을 훑어보겠지. 어떤 말을 골라 써야 좋을지, 어떤 구절이 나을지 하며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일주일, 한 달이 지난 어느 저녁노을이 질 때쯤 부른 배를 쥐고 소화도 시킬 겸 골목을 산책하다 이 집, 저 집에서 흘러나오는 밥 내음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간간한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골라 쓰기를 몇 번, 이제 불면증은 내가 안고 가야 할 짐이요, 새벽녘까지 잠들지 못해 책상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 것이다.


문득 책상 앞 창문에 비춘 달빛이 서서히 보인다. 어쩐지 지금껏 애쓰게 써 내려온 글들을 모조리 지워낸다. 하얀 백지 위에 비로소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이 완성된다. 아마 그런 생각을 하며 시를 썼을 거라 지레짐작해본다. 골목 어귀 곳곳에 이 시인들의 이야기가 괜스레 궁금해져 혼자 기웃거려본다. 이제 다 본 건가 생각이 들어 돌아가던 찰나, 막다른 골목 끝에서 발견한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시 하나.


몸도 마음도 무너져 내릴 만큼 힘든 일이 생길 땐 내가 크려나 보다,
내가 아직 작아서 크려고 이렇게 아픈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꽃들에게서 희망을 수혈받을 수 있는 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시인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솔직하게 마음에 와 닿는 이 시의 한 구절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언젠가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런 시를 본 적이 있다며 그날 내가 받은 위로의 마음을 담아 이야기해주고 싶은, 이 한 편의 시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골목의 활기가 도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그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큰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는 곳곳마다 마치 어수선해 정돈되어 보이지 않는 착각이 드는 물건들이 집 앞에 나와 있길래 궁금해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각종 폐품으로 만들어낸 작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아주 귀여운 펭귄의 모양새를 띄며 아주 작거나, 혹은 크거나 한 펭귄들이 소소하게 날 반겨주고 있었다.


첫 번째 여행을 외롭지 않게 해 준 이 골목이, 지금 일상생활에서 마주한 골목 한 귀퉁이를 바라볼 때면 생각이 나곤 한다. 아마 그 골목이 생각나는 것은 그때 마주친 아주 작고 귀여운 마법의 펭귄 녀석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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