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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Mar 19. 2021

5. 오월, 깊은 시간 중력으로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

광주에서의 마지막 날.

이 장소를 계획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광주의 오월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80년 5월, 많은 이들도 잘 알고 있는 역사의 한 대목 '5.18 민주화 운동'을 간접적으로나마 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나라 간의 문제가 아닌 나라 안에서의 자국민들끼리의 역사는 유독 더 아프게 다가온다.


"멀리서 오셨네요!"


웃으며 인사하는 직원에게 나도 웃으며 답례의 인사를 건넸다. 친절한 그녀는 내게 방명록 작성을 부탁했다. 목록을 보니, 미리 다녀갔던 사람들은 당연하게 광주시민들이었다. 어쩐지 '제주'라고 쓰기에 조금 민망해져 잠시 망설였던 건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타지에 나갈 때 '제주에서 왔다'라고 하면 내가 다 놀랄 정도로 '어머! 제주도요!?'라고 되묻거나, '좋은 곳에서 오셨네요!'라는 악의 없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럴 때마다 어쩐지 낯부끄러워지곤 한다. 이곳의 직원 또한 반응이 같아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어쩌다 이곳에 방문하게 되었냐고 묻는 그녀의 말에 오월의 광주를 간접적으로나마 보고 싶었다며 대답을 건네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챙겼던 가방을 도로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 귀퉁이에 놔두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마 그녀는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가려던 참이었을 것이다. 눈치를 살피며 멀뚱히 서 있자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나를 전시관 입구까지 끌어당겼다.


"사태, 사건도 아닌 민주화 '운동' 혹은 민주화 '항쟁'이라고 불리는 이유엔 당시 군부정권에 저항한 의로운 시민항쟁이어서 그렇게 불리는 거예요. 운동이나 항쟁으로 꼭 기억해주길 바라요."


비슷한 말 같지만, 전혀 다른 이 단어들을 짚어주며 그녀는 내게 당부했다. 말하는 조그마한 입술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그렇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반짝이던 눈을 거두고 천천히 관람하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신의 점심시간까지 내어주며 설명해주려는 행동, 그 자체에 힘이 생겼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았다.


1층 전시실은 그날 일련의 사건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하나하나 그날의 사건을 더듬기라도 하는 듯 나는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1980년 5월 17일의 밤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공수부대는 도청으로 향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곤봉과 총검을
휘둘러 무차별로 살상했다. 분노에 찬 시민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지만,
금남로는 시민들이 흘린 피로 물들어 갔다.


마음 안에서 천불이 났다. 분노가 휩싸인 건 당연지사고 눈가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날의 생생한 현장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눈앞으로 지나갔다. 밤이건 낮이건 들려오는 총성 소리, 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찾겠다며 혈안이 되어 무장한 군인들이 집안 곳곳을 들쑤시는 장면들, 공포에 질린 사람들, 비탄한 절규의 신음소리, 비명소리…. 어제까지만 해도 오다녔을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일제의 침략도, 미 정부의 탄압도, 북한군과의 전쟁도 아닌 같은 나라 안에서의 무차별한 살상.

오랫동안 열망해왔던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은 잔인한 곤봉과 차가운 총검뿐이었다. 시간이 오래도록 지났어도 잊히면 안 되는 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늘 마음에 큰 돌덩이 하나를 얹은 기분이다. 학습으로든, 어떤 경우에서건 마주한 박물관과는 달랐다. 그날의 기록만 온전히 담겨 있는 곳은 살면서 처음으로 방문해본 곳이라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조금 안으로 더 들어가다 보면 누구 것인지 찾을 수 없는 핏빛으로 물든 신발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그 사이 황색의 차가운 실탄도 무참히 도로에 박혀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놓여 있는 신발들. 그 위로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날의 재연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분위기에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온 목적을 상실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애써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어쩐지 1층만 돌아봤을 뿐인데 힘이 다 빠진다. 그날의 현장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안에서 그들의 상황을 그저 관망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고통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 치유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생생히 내 안으로 점점 파고들어 왔다. 그날의 사건을 기록해둔 기록실을 겨우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다.


80년 5월 광주는 국민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언론부터 장악하여 광주를 통제하고 다른 지역에는 일부 학생들이 '쿠데타'를 벌이고 있다며 허위사실을 유포하니 눈은 뜨고 있으나 앞을 보지 못했다. 기자들이 끊임없이 그날의 현장을 사진에 담고 기사를 내었으나 신문은 나오기가 무섭게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졌다. 진실은 그 아무 곳에서도 찾아보지 못했다. 기록관은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내용이 모두 겪어온 역사였고, 나라의 뼈아픈 진실이었다. 관람 안내 표시를 따라가다 보면 일련의 시간 흐름대로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차례대로 볼 수 있었다.


5월 21일 새벽, 시외전화가 끊겼다.
3일 동안 참극을 지켜본 시민들이 금남로를 가득 메웠다.
… 공수부대는 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했다. 오후 1시 20분경, 침묵과 긴장감 속에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공수부대는 시민들과 차량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금남로는 수많은 시민들이 피로 물들었다.



현재의 나는 역사에 대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 한번 되짚어 생각해본다. 모든 역사를 낱낱이 기억하기는 쉽지 않으니, 아픈 역사만이라도 제대로 눈을 뜨고 기억해본다. 기록관이 주는 울림은 대단했다. 5.18 민주화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어떤 맺음을 지었는지 보기 쉽도록 구성해놓았다. 전시해 놓은 것을 가만히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벌써 점심시간이 끝났나 보다. 관람객이 서서히 들어오는 것 같았다.


"누나는 누구야?"


문득 아주 작은 목소리 하나가 들려 뒤로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작디작은 꼬마가 궁금한 눈초리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싶어 잠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나 누나!'라며 내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나 누나는 또 누구람, 빙긋 웃으며 작게 '안녕!'이라고 대답해주니 혼자 신나 저만치 총총 뛰어간다. 기록관엔 나와 그 아이뿐이라 눈살 찌푸리는 사람도 없었으며 아이도 내게 흥미가 떨어졌나 보다 싶은 마음에 기록물에 집중하려는 순간 정면에서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저 혼자 신나 달려가다가도 유리관에 가까워졌다 싶으면 종종걸음으로 멈춘다. 그리고 조심스럽고 궁금이 가득 찬 표정으로 전시된 기록물들을 들여다본다. 아이는 주로 아무것도 없는 복도 사이를 오갔다. 참 착한 아이였다. 소중한 것을 소중히 다룰 줄 아는 아이였다.


순간 아이와 시야가 맞부딪친다.


"하나 누나!"


아이가 날 자기 방식대로 부르는 순간 잠깐 놀랐지만, 방긋 웃어주고 내게 달려오는 아이와 함께 조심스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기록물들을 보여줘 본다. 아이는 다시 이곳을 찾을 무렵, 아마 어엿한 학생이 되어있겠지. 그땐 머리에 쥐가 나도록 역사를 배웠을 테고, 이 공간이 주는 힘을 조금이나마 깨닫겠지 하며 그 아이의 미래를 떠올렸다.


아이의 부모가 헐레벌떡 우리 쪽으로 뛰어왔다. 내게 민망하게 웃으며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곤, 아이에게 주의를 시키는 모습에 그러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멀어지는 아이를 향해 손을 세차게 흔들어주고, 문득 핸드폰을 보니 전주로 향하는 버스 시간이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서둘러 기록관을 빠져나왔다.

나를 맞이해준 직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시간대가 안 맞았나 보다. 다른 직원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넨 뒤, 후다닥 기념관을 빠져나왔다.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밖에서도 울려 퍼진다. 착각일까.

지금도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단 한 번의 인연 또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이런 느낌일까? 아이야, 하나 누나 갈게. 잘 지내고 무럭무럭 자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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