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민철 Aug 18. 2019

우리 모두에게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만 여행에서 경험한 축적의 시간, 축적의 삶.

여행은 늘 호기심을 자극한다.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음식 그리고 새로운 문화를 매시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대만에 다녀왔을 때도 그랬다. 국제통화기금(IMF)을 기준으로 우리보다 훨씬 더 빠른 1983년에 선진국으로 분류된 나라이자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넘어간 최초의 사례인 대만. 우리나라와 거의 동일한 수준에서 시작하여 중간소득함정에 빠지지 않은 나라로 세계은행이 분류하고 있는 국가인 대만. 홍콩, 싱가포르, 한국과 함께 세계인들에게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는 대만. 그러나 대만의 현재 모습은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짧은 여행으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대만의 외형적인 모습에서 발달된 국가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직접 경험한 타이베이와 서울의 차이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여행을 하던 중, 서울대 이정동 교수님의 <축적의 시간>과 <축적의 길>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대만의 산업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고자 했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의 어느 거리에서


대만의 산업은 전방산업보다는 후방산업 위주로 굴러간다. 쉽게 말해서 하청 위주로 경제가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대만 경제의 구심점이 반도체 제조과정만 전담하는 파운더리 기업인 TSMC와 같은 기업에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더 익숙한 사례를 들자면 애플의 하청 회사로 유명한 폭스콘도 대만의 기업이다. 대만은 전형적인 OEM 전문 국가인 것이다.


대만은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후발자의 이득'을 취하며 성장한 대표적인 나라다. 여기에 화교망과 중국 경제권의 도움을 받아 타국에 비해 빠르고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덕분에 어느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쉽고 빠르게 양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상황이 대만의 현재를 위해서는 악조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대만에게 질적인 성장을 할 필요와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베이터우 시립 도서관


모든 제품이 생산되는 구조, 즉 가치 사슬은 크게 '개념설계 - 구매 - 실행'의 단계로 이뤄진다. 여기서 '실행'에만 특화된 대표적인 예가 OEM이다. 이는 곧 가치사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설계' 역량이 OEM 기업에게는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부가가치 창출 능력의 상대적 결핍으로 이어진다.


OEM의 특징은 '정해진 기간 내에, 정해진 품질 수준으로, 정해진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해내는 것'이 목표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창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딱 맞는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반대로 개념설계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다. 남들이 정해 놓은 틀을 깨고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것이 능력이다. 이 때문에 OEM만으로 창출할 수 있는 부가가치와 개념설계 역량을 갖고 창출할 수 있는 부가가치의 차이는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빠르게 성장해 온 대만에게 부가가치 창출 역량,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창출해 본 경험의 부재가 '축적의 시간'이 되어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경제의 규모를 떠나서 주도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현재의 타이베이와 서울의 차이를 만들어 낸 이유가 아니었을까.


축적의 시간이 비단 한 국가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개개인의 삶도 죽기 전까지는 무언가를 축적해나가는 연속된 과정이다. 이왕 사는 것이라면 남의 그림을 실행하는 단계를 넘어 계속 도전하고 학습하고 축적해 나가는 인생, 보다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것이 나와 내 주변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 여행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